부정청탁법(김영란법)시행으로 일상생활에서는 과도한 접대 문화가 줄어들고 사소한 청탁도 거절하는 문화가 조금씩 자리잡고 있지만 최순실 국정농단 같은 ‘거악(巨惡)’에는 사실상 무용지물이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김영란 법이 공직자 등 공적인 직위에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데다 부정청탁이라도 자신을 위해서 했다면 처벌하지 않도록 하고 있는 맹점 때문이다.
물론 김영란 법은 지난 9월 28일부터 시행됐기 때문에 법 시행 이전에 발생한 최순실 국정농단에 소급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앞으로 ‘제2의 최순실’이 나와도 이를 막을 수 있겠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검찰 공소장을 보면 최 씨는 미르재단과 K-스포츠에서 공식 직책 없이 재단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며 이권을 챙기려 했다. 최 씨는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을 통해 박 대통령에게 미르 재단의 설립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에게 재단 설립을 서두르도록 지시했다.
최 씨는 미르재단과 K-스포츠의 임원진 인선안과 사업 계획서 등을 안 전 수석에게 전달했다. 안 전 수석은 이를 토대로 재단 운영을 위한 대기업 출연금 할당액을 확정했다.
실제 두 재단은 설립 요건을 갖추지 않았는데도 정부가 이례적으로 빠르게 인가절차를 진행했다. 대기업 출연 또한 대통령이 직접 기업 회장을 독대하며 반강제로 이뤄졌다. 최 씨는 더 블루 케이를 설립해 재단 관련 이권 사업에 개입하는 사업안을 박 대통령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최 씨가 사실상 자신을 위해 대통령이나 청와대 수석 등 공직자에게 부정 청탁한 것이다.
김영란 법은 모든 사람의 부정청탁을 금지하고 있지만 자신을 위한 경우는 과태료 부과 대상이 아니다. 결국 최 씨는 김영란 법이 금지한 부정 청탁을 했더라도 과태료를 부과할 수 없게 된다는 해석이 나온다.
다만 최 씨의 부정청탁을 수행한 박 대통령과 안 전 수석, 정 전 비서관은 공직자이기 때문에 김영란 법에 따라 최고 2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 원 이하의 벌금 처분을 받을 수 있다. 또 최 씨가 자신이 아니라 재단을 위해 부정청탁을 했다고 간주하면 제3차 청탁으로 처벌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도 최 씨는 2,000만원 이하의 과태료 처분에 그치며 징역형은 없다.
김영란 법 제정을 자문한 서보학 경희대 법대 교수는 “최 씨가 자신을 위해 부정청탁 했다면 김영란 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면서 “이는 국민의 청원권을 보장하되, 그것이 부정청탁에 해당한다면 공직자 선에서 막겠다는 김영란 법의 취지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영란 법이 스승의 날에 선생님에게 달아드리는 카네이션도 학생의 성적 평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금지하면서 정작 거대한 돈이 오가는 민간의 음성적 로비활동은 규제할 수 없는 것은 법의 한계라는 비판이 나온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공직자는 물론 민간인도 지금까지 김영란 법의 ‘3·5·10 규정’을 지키느라 애써왔는데 최근의 사태를 보며 회의가 든다”면서 “김영란 법으로 부정부패가 근절될 것으로 기대한 여론과 동떨어진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임세원기자 wh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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