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회에 부당함이 만연할 때 문화예술이 돌파구 역할을 해야 합니다. 현 상황에서 우리가 가만히 있을수 없지요.”(노순택 사진 작가)
“부산국제영화제 같은 세계적인 영화제가 정부 압력 탓에 망가져 가는 걸 보고 있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내가 이러려고 감독을 했나 싶어요.”(연상호 영화 ‘부산행’ 감독)
때론 날카로운, 때론 속 시원한 지적이 쏟아졌다. 소속된 분야는 달랐지만 ‘문화예술인’이라는 이름으로 한 데 모인 100여 명은 정부의 문화 검열 및 블랙리스트 작성을 성토했다. 9일 서울문화재단 주최로 서울 시민청 태평홀에서 열린 ‘블랙리스트와 시국선언’ 토론회에서는 정부의 문화 독재를 향한 강력한 비판이 이어졌다. 특히 검열·블랙리스트 당사자로 알려진 사진작가 노순택·소설가 한창훈·신현식 앙상블 시나위 대표를 비롯해 영화 다이빙벨 상영 논란(부산시장이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이빙벨 상영 취소를 요구)으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불참한 연상호 부산행 감독·박원순 서울시장·연극평론가 김미도 등이 토론회 패널로 참석해 ‘블랙리스트의 시대, 예술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논의했다.
참가자들은 ‘검은 명단’의 존재와 저의를 ‘지원금을 통한 예술계 장악’이라며 규탄했다. 노순택 작가는 “블랙리스트를 굳이 한국말로 바꾸면 ‘돈 주면 안 되는 애들’”이라며 “돈만 아는 저질들이 예술가들을 ‘돈줄을 쥐락펴락하며 얼마든지 갖고 놀 수 있는 대상’으로 바라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검열은 비단 특정 장르만의 문제가 아닌, 이 사회에서 취약한 영역을 장악·통제함으로써 시범 케이스를 만들고자 하는 정부의 시도”라며 “‘우리에게 밉보인 딴따라들이 어떻게 되는지 봤지?’하는 식의 생각”이라고 지적했다. 한창원 작가 역시 “광우병 파동 이후 지원금 신청 당시 ‘정치적인 집회에 참석하면 지원금을 뺏거나 책임을 묻는다’는 각서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며 “돈 가지고 농락하는 것처럼 유치한 게 없다”고 평가했다. 연상호 감독도 정치적인 내용의 영화를 상영하지 못하게 하거나 ‘제한 상영가’로 등급을 정해 작품에 사실상 사형선고를 내리는 사례를 거론하며 또 다른 형태의 검열과 블랙리스트를 비판했다.
박원순 시장은 “리스트에 올라 중앙정부 지원받지 못한 작가·작품을 서울시가 알아보고 지원하는 게 지금 이 단계에서 필요하지 않나 싶다”며 “보조금 없이 예술가들이 창작활동을 해나갈 수 있는 인프라를 까는 데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얘야 박근혜 대통령이 아빠를 미워하나 보다.’ 노순택 작가는 본인이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것을 확인한 뒤 자녀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아이가 보낸 한 마디는 ‘역설적인 기쁨’과 위로를 안겨줬다. ‘헐, 그래도 그분이 좋아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요?’
한편, 문화예술인 7,500여 명과 국악·음악인 2,000여 명이 잇따라 시국선언을 한 가운데, 한국연극평론가협회도 이날 시국선언문을 내고 ‘정권의 책임 있는 자기 정리’를 촉구했다. 협회는 ‘문화예술계와 연극계 내부에서 정권에 기대어 활개 치는 인사들과 단체들은 더 이상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며 ‘부패권력의 하수인들을 영원히 퇴출시키겠다는 각오와 자세로 결연하게 행동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국민 대다수가 바라는 이 정권의 책임 있는 자기 정리, 국가와 사회의 안정적 지속을 위한 명확한 향후 계획 발표’도 촉구했다.
/송주희기자 sso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