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인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1885∼1923)의 자서전이 번역돼 나왔다. 1923년 일본 간토(關東)대지진이 일어나던 해 헌병의 손에 의해 39살의 나이로 잔혹하게 살해된 뒤 출간된 그의 ‘자서전’과 ‘일본탈출기’를 한데 묶은 책이다. 일본 아나키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오스키 사카에는 조선과도 인연이 깊은 인물. 사카에는 여운형, 이동휘 등 조선의 주요 인물과 직접 만나 국제연대를 꾀하기도 했다. 그는 ‘국가적 편견과 민족적 증오 없이 조선과 일본 양 국민이 진정으로 융합하는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취지로 재일 조선인들과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했다. 조선의 아나키스트들이 그의 저서를 교재로 삼아 학습할 정도로 그는 조선의 아나키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군인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천황의 군인을 길러내는 육군유년학교의 군대식 교육을 거친 뒤 집단적 광기와 폭력 속에서 진정한 인간상의 구현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가 아나키스트가 된 것은 자신의 의지만이 아니라 강압적 시대가 낳은 산물인 셈이다. 그는 언어의 천재로 불렸다. 한 번 감옥에 들어갈 때마다 외국어를 하나씩 익힌다는 원칙을 세웠던 그는 수감될 때마다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을 섭렵하고 아나키즘의 주요 서적과 사상서들을 직접 번역했다. 서양의 근대와 동아시아의 전통이 만나는 과도기를 온몸으로 헤치며 국제주의와 이상주의를 펼쳤던 한 젊은 아나키스트의 삶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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