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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A군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기 위해 차를 타고 교외로 나가야 하는 납골당에 가지 않는다. 대신 스마트폰을 통해 일종의 '디지털 추모관'에 접속한다. 생전 A군의 아버지는 디지털 장의업체에 '인터넷 이곳저곳에 남겨진 디지털 유산을 모두 지우고 대신 이를 추모관에 모아달라'고 요청했다. 이제 A군은 디지털 추모관에서 아버지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동영상과 아버지가 인터넷 게시판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남긴 글 등을 보며 아버지를 추억한다.
A군의 사례는 아직 현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터넷에 남겨진 망자(亡者)의 디지털 정보를 청소해주는 온라인 상조업 '디지털 장의사'가 활성화되면 가까운 시일 내에 볼 수 있을지 모르는 풍경이다. 실제로 디지털 장례업체인 산타크루즈캐스팅컴퍼니는 이 같은 서비스를 이르면 올해 안에 제공할 계획이다.
무엇을 하든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는 디지털의 특성 탓에 인터넷 이용자는 언제든 이 흔적이 자신을 역습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특히 잇따르는 개인정보 유출 사태로 '개인정보가 아니라 차라리 공공정보라고 불러야 한다'며 쏟아지는 푸념들은 이 불안감을 더욱 부채질한다.
점차 개인 사생활 보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이에 한몫한다. 디지털 장의사와 디지털 세탁소는 삶의 중요한 순간이나 심지어는 사후에까지 우리를 덫에 빠뜨릴지 모르는 과거 인터넷의 행적을 지우려는 사람들의 심정을 그대로 보여주며 올해 '대박 사업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실제로 디지털 세탁소나 디지털 장의사 업체는 10여곳 정도로 추정되는데 향후 그 수가 크게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가운데 이 같은 디지털 '삭제업'에 대해 불법성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디지털 세탁소와 관련해서는 우선 권리의 충돌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잊혀질 권리'와 '알 권리'가 부딪힐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디지털 정보 삭제 업체들은 정치인이나 유명 연예인들의 '평판 관리' 서비스를 제공한다. 평판 관리는 이들 유명인에 대한 악의적인 비방이나 허위사실, 이를 기반으로 한 콘텐츠 등을 게시자로 하여금 삭제하게 하는 것이다. 비용은 높은 수준이다. 개인의 경우 디지털 세탁 비용은 몇십만원 선이지만 유명인 평판 관리 서비스의 경우 유명도에 따라 억대 대금을 내는 사례도 있다.
하지만 평판 관리는 자칫 유명인들의 '구린 이면'을 마음 놓고 지울 수 있는 도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방송통신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유명 정치인이 과거에 잘못된 행적을 저질렀는데 이를 잊혀질 권리라고 주장하며 다 지워버리면 유권자의 알 권리가 침해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호진 산타크루즈캐스팅컴퍼니 대표는 "유명인이더라도 개인으로서 사생활을 보호받아야 할 권리가 있는 것 아니냐"라며 "알 권리가 더 넓게 인정받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반박했다.
법적 권한 논란은 더 큰 문제다. 디지털 삭제는 보통 요청자의 권한을 위임받은 업체가 인터넷 포털사이트나 웹사이트의 게시자에게 요청해서 해당 게시물을 지우는 것이 기본 구조다. 그러나 업체의 요청을 받은 포털이나 게시자가 요청을 꼭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김경환 법무법인 민후 변호사는 "게시자에게 게시물을 지우도록 강제할 수 있는 법적인 절차가 현재로서는 없다"며 "불법임이 확실한 음란물이나 명예훼손·모욕의 소지가 있는 게시물은 (게시자가) 삭제해야 하지만 이것조차도 법원의 판단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디지털 삭제업은 사실상 완전한 합법도 아니고 그렇다고 불법도 아닌 일종의 회색지대인 셈이다.
불법성 논란이 이는 것은 디지털 장의사도 마찬가지다. 고용노동부 산하 한국고용정보원이 지난해 10월 내놓은 '국내외 직업비교 분석 및 분야별 창직연구'는 디지털 장의사가 국내에 완전히 도입되기 위해서는 법적 제도 완비가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디지털 장의사 같은 제3자에게 디지털 유산에 대한 권한을 얼마나 인정할 수 있는지 논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이 작성한 정보에 대한 삭제 요청 권한을 제3자에게 승계·관리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추가적으로 검토돼야 한다는 것이 고용정보원의 입장이다.
디지털 유산이 실제 재산 같은 유산이라면 이에 대한 상속을 규정할 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국내법상 영리를 목적으로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동의하는 건 가능하지만 개인정보보호법상 제3자에게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건 불법이다.
이 때문에 현재는 디지털 세탁소, 디지털 장의사 업체의 정확한 현황 파악이 어려운 상태다. 고용정보원 관계자는 "디지털 장의사는 사실상 현재 불법이기 때문에 시장이 제대로 형성되기가 어렵다"며 "형성됐더라도 법적 테두리에서 가능한 선에서만 사업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지난해 7월 디지털 세탁소와 디지털 장의사를 '창조경제를 이끌 신직업'으로 선정했다가 올해 디지털 장의사를 중장기 검토 과제로 넘긴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불법성 논란이 계속되는 국내와 달리 외국에선 디지털 삭제업이 폭넓게 인정되는 분위기다.
덴마크의 디지털 평판 관리 전문업체인 레퓨테이션닷컴(reputation.com), 미국의 리무브유어네임(remove your name)같이 우리로 치면 '디지털 세탁' 업체들은 이미 2~3년 전부터 성업 중이다. 특히 미국은 개인정보를 지나치게 공개하는 것에 예전부터 경각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09년 미국 청소년들에게 "페이스북에 지나치게 많은 개인정보를 올리는 것은 위험하다. 나중에 자신의 인생을 가로막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온라인 상조회사도 인기다. 미국 업체 라이프인슈어드닷컴(lifeensured.com)은 대략 300달러, 우리 돈 30만원 정도의 비용으로 '인터넷 장례 절차'를 치러준다. 회원의 사망신고가 접수되면 이 회원의 유언을 확인한 뒤 흔적 지우기, 사망 사실 자동 알림 서비스 등도 제공한다.
독일에서는 살인 형기를 마친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기사를 삭제해달라'며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이긴 사례도 있다. 유럽연합(EU)은 2012년 1월 잊혀질 권리를 명문화한 정보보호법 개정안을 확정해 2014년 발효를 앞두고 있다.
◇ 용어설명
-디지털 세탁소 : 인터넷,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 노출된 개인의 정보나 게시글, 사진·동영상 등을 삭제해주는 업종. 개인의 명예를 실추시킬 수 있는 게시물을 검색해 이를 지워주는 '평판 관리' 서비스도 제공한다.
-디지털 장의사 : 고인의 사이버 흔적을 정리해주는 업종. 사후 고인에게 오는 연락에 대해 고인의 사망 사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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