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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이후 역대 정부의 규제 완화는 진영과는 상관없는 일관된 기조였습니다. 신용카드 대란, 저축은행 사태 등 매번 잘못된 규제 완화로 후폭풍을 겪었음에도 이에 대한 검증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규제 완화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먼저 규제를 없애는 게 정말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고 기업 경쟁력을 높이는 것인지 정확한 검토가 필요합니다."(최희갑 아주대 경제학과 교수)
외환위기 직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대대적인 신용카드 장려정책을 폈다. 소비를 살려 내수를 북돋고 숨은 세원을 포착하겠다는 의도였다. 핵심 골자는 규제 완화였다. 총여신액의 40% 이상으로 정해놓았던 카드사 신용판매 취급비중을 폐지한 것을 시작으로 월 70만원이던 현금서비스 이용한도마저 없앴다.
대통령 직속 규제개혁위원회가 카드사에 '길거리 모집'을 허용한 것은 규제 완화의 결정판이었다. 소득이 없는 실직자·대학생, 심지어는 사망한 사람 명의로도 카드가 발급됐다. 이 같은 규제 완화로 생긴 신용불량자만 지난 2003년 372만명에 달했다. 결국 카드업계 1위였던 LG카드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부실을 견디지 못하고 매각되는 비운을 겪는다.
비단 신용카드 대란 이야기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규제총량제를 도입했던 노무현 정부는 2005년 저축은행의 대출 제한을 풀어줬다. 당초 규제 완화의 목적은 서민금융 활성화였지만 규제의 굴레를 벗은 저축은행들은 서민금융 대신 프로젝트파이낸싱(PF) 투자에 뛰어들었다. 저축은행의 무분별한 PF는 주택시장의 거품을 더욱 키웠고 거품이 꺼지면서 이명박 정권 들어 연쇄적으로 무너졌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왔다.
최근 우리 사회에 다시 불어닥친 규제 완화 열풍을 두고 이 같은 전례가 반복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나치게 기업 경쟁력 강화에 방점을 찍은 '완화' 일변도라는 것이다. 특히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수도권 규제 완화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시대 환경 변화에 맞춰 낡고 경직적인 규제는 완화하고 새롭게 필요한 규제는 도입하는 등 규율체계 전반의 합리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규제개혁을 해야 한다"며 "수도권 규제 완화는 어떤 비용과 혜택을 가져오는지 그리고 사후관리가 어떻게 필요한지 체계적인 틀 없이 추진되는 것 같아 걱정이 크다"고 말했다. 완화가 필요하고 시장의 실패를 사전에 방지하는 규제 등을 선별하기 위해 규제의 정책적 효과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수도권 규제를 비롯해 안전규제, 환경규제, 사교육 억제책, 동반성장 규제 등 필요한 규제가 맹목적 규제 완화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 최희갑 아주대 교수는 "규제는 신호등 같은 거다. 신호등이 개별 운전자 입장에서는 정말 불편하지만 이 때문에 사고가 덜 난다"며 "규제 완화를 하려면 정책적 목표와 결과를 정확히 계량하는 편익분석이 무엇보다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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