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건너왔던 값비싼 장비들이 새로운 주인을 찾아가기 위해 하나씩 둘씩 해체당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일자리가 사라진다”며 안타까운 눈물을 보이는 현지 근로자들도 눈에 띄었다. 지금부터 정확히 13년 전인 1993년 캐나다 퀘백주 브루몽의 현대차공장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현대차에선 아직도 ‘브루몽의 악몽’이라고 불리고 있는 해외진출 최악의 실패 순간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미국시장 공략을 위해 지난 89년 연산 10만대 규모의 북미 현지공장을 설립했지만 소비자들의 냉담한 반응으로 4년 만에 두 손을 들었다”며 “품질에 대한 불신이 실패의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말했다. ◇세계 자동차의 메인 시장에서 달리자= 그로부터 7년여의 세월이 흐른 2000년 7월 어느날 정몽구 회장은 이른 아침부터 해외본부장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은 후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2005년이면 미국과 유럽시장 판매량이 50만대에 이르고 각종 수입규제도 예상됩니다. 거센 통상압력을 버티기 어려운 만큼 (이제는) 미국 현지공장 설립이 필요합니다.” 세계 자동차 시장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정면승부’를 펼치자는 이야기였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한 고위 임원은 “브루몽 실패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탓인지, 다들 ‘글쎄’ 하며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우리의 차종과 품질로 과연 승부를 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가장 컸다”며 당시의 비관적인 분위기를 전했다. 정 회장은 이후 일사불란하게 특유의 뚝심을 발휘하며 미국 현지공장 프로젝트를 밀어 부쳤다. 2005년 5월 20일.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에 위치한 ‘현대 대로(Hyundai Boulevard)’ 700번지. 현대차는 마침내 이곳에 공장을 완공하고 성대한 자축연을 열었다. 정 회장은 이날 “오늘은 현대차가 38년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감격적인 순간이자 앞으로 진정한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의 위상을 갖추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고, 임직원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기립박수를 보냈다. “지난 1998년 말 인수한 기아차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정 회장은 해외공장 건설에 부쩍 많은 관심을 표했습니다. 내수시장엔 한계가 있는 만큼 해외에서 차를 만들어 얼마나 많이 파느냐가 글로벌 기업으로의 성장을 좌우한다고 판단했던 것이죠.” (2001년 초부터 현대차 앨라배마공장 설립을 실무적으로 주도했던 A임원) ◇‘앨라배마 드림’, 꿈이 현실로= 쓰디쓴 실패의 맛을 곱씹으며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낸 탓일까. 앨라배마 공장 건설을 통한 재기를 전후해 정 회장이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역시 ‘품질’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품질본부장’으로 칭하며 “세계최고 품질의 차를 만들라”며 연신 임직원들을 다그쳤다. 현대차 품질총괄본부의 한 관계자는 “이 때문에 매년 미국에서 신차품질지수(IQS)가 나올 때 마다 숨죽이며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고 전했다. 앨라배마공장에서 ‘메이드 인 USA’ 마크를 단 쏘나타 1호차가 첫 출고된 지난해 5월 무렵. 세계적 마케팅 조사기관인 JD파워가 실시한 신차품질지수 평가에서 현대차는 도요타 등 유수업체를 따돌리고 10위를 기록했다. 이어 올해 같은 조사에서는 무려 7계단이나 더 오르며 ‘톱3’에 이름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외신들은 이를 두고 “현대차의 야심찬 행보가 디트로이트의 ‘빅3’를 긴장시키는 것은 물론 세계 자동차 업계의 판도까지 바꾸고 있다”(포브스)며 ‘기적(miracle)’ 등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싸구려 차’란 오명을 드디어 씻어내고 ‘품질의 현대’로 본격 인정을 받은 셈이다. 미국 더글라스에 있는 현대딜러점의 스티브 키프 총지배인은 “현대차에 대한 미국 고객들의 선호도가 갈수록 높아지면서 매장을 찾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며 “현대차의 가치가 높아지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가끔씩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라고 현지 분위기를 소개했다. 실제로 현대차는 지난해 미국시장 점유율이 2.5%를 돌파한 데 이어 지난달에는 ‘마의 3%벽’을 넘어서는 등 거침 없는 질주를 거듭하고 있다. ◇과감한‘도전’은 계속된다= 강자는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위기를 오히려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활용한다고 했던가. 현대차는 미국 공장의 가동과 함께 품질에 대한 호평, 브랜드 가치상승 등이 어우러지며 몸값을 한껏 높이고 있지만 여전히 ‘배가 고픈’ 눈치다. 정 회장은 외신들이 현대차의 질주에 극찬에 가까운 호평을 내놓을 때마다 “작은 성취감에 취해 자칫 추진력이나 도전정신이 해이해져서는 안 된다”며 직원들의 ‘정신재무장’을 강조하고 있다. 연초의 전격적인 비상경영 선언도 같은 맥락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세계 최고의 품질을 향한 끊임 없는 열정과 먼 미래를 내다본 도전적인 ‘선택’을 통한 해외 현지공장 설립, 스스로를 믿되 결코 자만하지 않는 자세 등이 ‘절대강자’를 향한 현대차의 질주를 이끌어 온 원동력”이라고 입을 모은다. 현대차 고위 관계자는 “특유의 ‘품질경영’과 ‘철저한 현지화’를 바탕으로 한 글로벌 공략은 사실 지금부터가 시작”이라며 “갈수록 치열해지는 시장구도와 경쟁업체의 거센 견제 등 난제가 예상되지만 이들과의 정면승부를 위한 도전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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