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5월5일 오후2시, 춘천. ‘중국 민항’ 소속 여객기 한대가 미군의 헬기 비행장에 내려앉았다. 중국 본토에서 비행기가 날아들기는 1949년 중공 정권 수립 후 처음. 느닷없이 불시착한 여객기는 얼어붙었던 한국과 중공 간 관계 개선의 물꼬를 텄다. 랴오닝성의 선양(瀋陽)을 출발한 이 여객기의 당초 도착지는 상하이. 납치범 6명이 권총을 쏘며 기체를 타이완으로 돌리라고 협박하는 통에 북한 상공을 거쳐 춘천에 착륙한 것이다. 사건 초기에 한국은 불시착 이유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미군시설이라는 이유로 접근을 금지당했기 때문이다. 결국 정보기관이 나서고야 납치 동기를 파악하고 승객과 승무원 99명이 풀려났다. 한국 입장에서 민항기는 중공과 접촉할 수 있는 ‘조커’였다. 몸이 달은 중공 정권은 사건 이틀 후 전세기를 띄워 대표단 33명을 서울로 보냈다. 제주도 남쪽을 우회해 서울에 착륙한 중공 측 대표의 첫마디는 양국의 앞날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돌아서왔다.’ 사건 닷새 후인 10일, 한중은 각각 정식국호가 명기된 합의문서를 주고받았다. 서울의 호텔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던 승객과 승무원들은 당시에는 한국에서도 귀했던 컬러TV 등 선물을 잔뜩 안고서 돌아갔다. 납치범들은 한국에서 실형 선고를 받고 약 1년을 복역한 후 추방 형식으로 타이완에 건너갔다. 양국의 교류는 스포츠단 상호 방문과 이산 가족ㆍ친지 초청, 1985년 한국의 대중 투자 허용을 거쳐 1991년 국교수립으로 이어졌다. 중국민항기 사건도 어느덧 4반세기. 호기심 어린 눈, 인민복 차림의 25년 전 중국 승객들과 서울 한복판을 오성홍기로 물들이며 한국 시민과 경찰을 구타하는 중국 청년들이 머릿속에 오버랩된다. 격세지감 속에 등골이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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