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1월24일] 윈스턴 처칠 권홍우 편집위원 주식 투기와 석유, 금본위제도, 전차와 노벨 문학상.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남긴 흔적이다. 핏줄부터 처칠은 투기와 관련이 깊다. 8대조 할머니인 사라 처칠은 자본주의 최초 버블의 하나였던 ‘남해회사’ 사건(1720년) 당시 투기로 10만파운드를 벌어들인 원조 여성 투기꾼이었다. 미국인 외할아버지도 19세기 후반 월가를 주름잡았던 투기꾼 출신이다. 미국 졸부들이 혈통을 얻기 위해 딸을 유럽의 귀족 가문으로 시집 보내는 풍토의 첫 케이스가 처칠의 어머니였다. ‘오리지널 달러 공주’로 불렸던 처칠의 어머니는 빼어난 미모로 런던 사교계를 주름잡으며 남편과 아들의 앞길에 도움을 줬다. 삼수 끝에 육사에 입학하고 알짜보직을 따낸 것도 어머니 덕분이다. 명성을 얻은 것은 보어전쟁. 전역 후 신문기자 신분으로 종군했으나 포로로 잡힌 뒤 탈출, 480㎞를 걸어서 생환해 영웅으로 떠오르며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식민성ㆍ통상성을 거쳐 해군성 장관을 지낼 때는 함정의 연료를 석탄에서 중유로 교체, 석유시대를 앞당기고 육군이 포기한 프로젝트를 ‘육상선박’ 건조 명분으로 부활시켜 최초의 전차를 선보였다. 전 후 재무장관 재직 시에는 경제학자 케인스의 반대 등을 물리치고 금본위제도를 부활시켰다. 장관직을 마친 처칠은 미국 주식투자에 나섰으나 조상들의 투기 실력은 유전이 안됐는지 파산 일보 직전에서 미국인 친구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본전을 건졌다. 다채로운 삶을 살았던 처칠은 저술가로도 유명하다. ‘2차대전회고록’으로 1953년 노벨문학상까지 받았다. 1965년 1월24일 91세로 사망한 그는 교회의 가족묘지에 묻혔다. 18세기 영국 투기꾼과 19세기 미국 투기꾼의 딸이 잠든 옆 자리에. 입력시간 : 2008/01/23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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