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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의 '영(令)'이 서지 못하는 데는 김한길 공동대표의 과거 이력도 영향을 미쳤다.
김 대표와 친노 진영 간 갈등의 골은 지난 2007년부터 시작됐다. 김 대표는 당시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을 탈당해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했다. 열린우리당에서 '난닝구(실용주의)파'로 활동하며 원내대표까지 지냈지만 그 과정에서 '백바지(개혁)파'와 심각한 노선갈등을 겪은 게 시발점이었다. 이후 17대 대선을 앞두고 대통합민주신당으로 야권 재편이 이뤄지면서 '고향'에 복귀했지만 열린우리당에 잔류했던 친노 인사들은 김 대표를 '비주류'로 대접했다.
19대 국회에서도 김 대표의 '탈당 트라우마'는 이어졌다. 당권에 도전했지만 친노 진영 좌장 격인 이해찬 상임고문에게 석패한 데 이어 18대 대선 국면에서는 '김한길 홀대론'까지 제기될 만큼 중요한 역할을 부여 받지 못했다. 당시 김 대표 측에서는 "전당대회에서 2위를 한 최고위원을 이렇게 취급해도 되는 것이냐"며 공공연하게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친노 진영과 김 대표가 아직까지 서로에게 '날'을 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전까지 야권은 친노가 주도했다. 2011년 민주당·시민통합당·한국노총이 결합한 민주통합당이 출범한 후부터 '제1야당'의 당권은 줄곧 친노 진영에 있었다.
19대 총선 직전인 2012년 1월 치러진 민주통합당의 첫 전당대회에서는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한명숙 상임고문이 선출됐다. 비록 한명숙 대표가 19대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취임 넉 달 만에 물러났지만 뒤이어 열린 6월 전당대회에서도 노무현 정부 국무총리 출신인 이해찬 의원이 당 대표로 뽑혔다. 이어 대선후보 경선에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낸 문재인 의원이 여유롭게 비노무현(비노)계 후보를 따돌렸다. 친노 진영의 '압승'이었다.
그러나 18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패배한 직후 야권 내부의 기류가 변하기 시작했다. 총·대선 과정에서 당권을 쥐고 있었던 친노 세력에 대한 책임론이 전면에 부각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당시 비주류 좌장 격이었던 김한길 의원이 지난해 5월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잡는 데 성공했으나 당내 최대 계파를 형성하고 있는 친노 세력의 영향력을 단번에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에 김 대표가 제3신당 창당을 추진하고 있던 안철수 의원을 끌어들이면서 반전을 꾀했지만 아직 그 파급력은 기대에 못 미친다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새정치연합의 한 관계자는 "김한길·안철수 지도부는 야권의 주도권이 친노에서 비노 진영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체제'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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