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집에서 가진 식사 모임에서 스테이크를 굽던 중 느닷없이 화재경보가 울렸다. 복도로 뛰어나간 필자는 급한 마음에 빗자루로 몇 차례 경보기를 찔렀다. 뜻밖의 대응에 놀란 듯 잠시 멈칫했던 경보기는 이내 다시 울부짖기 시작했다. 경보음은 천장에서 경보기를 끌어내려 배터리를 제거한 다음에야 멈췄다. 그때 손님 중 한 명이 “화장실 쪽에서 연기가 많이 난다”고 알려줘 확인해보니 화장실 냄새를 없애기 위해 켜뒀던 양초가 문제의 발단이었다.
인생은 이렇듯 시끄러운 신호로 가득 차 있다. 물가도 하나의 신호다. 사람들이 어떤 물건을 원하고 그들을 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은 얼마이며, 우리가 그 물품을 얼마나 구입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신호다. 표준학력고사 성적은 아이들이 특정 기술을 완전히 습득했는지 여부를 말해주는 신호다. 이러한 경고들은 필자의 화재경보처럼 대단히 불완전하다. 그러나 신호는 중요한 정보를 내포하고 있고 이를 무시하면 화를 입게 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종종 경고가 시끄럽고 번잡하다는 이유 때문에 무시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너네 화장실에 불이 났다” “당신네 학교는 학생 사이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인종과 소득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지나친 규제 때문에 주택을 신축하기 어렵다”는 식의 나쁜 소식을 일러주는 정보일 때면 특히 그렇다. 가장 이상적인 대응은 문제가 악화하기 전에 불을 끄고, 학교의 문제를 바로잡으면서 규제를 완화하는 것일 터이다.
하지만 실질적인 문제 해결 과정은 그리 간단치 않다. 정치의 경우 종종 피어오르는 연기를 흩어버린 후 모든 것이 정상이라고 주장하는 잘 조직된 유권자 단체들을 상대해야 한다. 따라서 기관들은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한 채 경보음이 멈출 때까지 해머를 휘둘러 경보기를 부숴버린다. 바로 이런 상황은 교육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발생한다. 준비와 성취 사이의 불일치를 바로잡는 대신 사람들은 평가 기준을 바꾸는 훨씬 간편한 해법을 택한다.
부모들은 표준학력시험에 반대했고 교사들을 상대로 자녀들의 나쁜 점수를 바꿔 달라는 로비를 펼쳤다. 지친 교사들은 성적 인플레이션으로 대응했고 많은 대학들은 표준학력시험 요건을 폐지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결과는 캘리포니아대 샌디에이고캠퍼스의 최근 보고서에서 확인된다. 나머지 UC 계열대와 마찬가지로 UC샌디에이고는 2020년부터 표준학력고사 점수를 입학 사정에 반영하지 않았다. 2024년 UC샌디에이고는 초중등학교 수학 실력 수준의 보충수업 클래스 신설을 위해 새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했고 2025년에는 전체 신입생의 8% 이상이 이 수업을 필요로 했다. 이는 UC샌디에이고를 비롯한 UC 계열대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경보에 대응하는 대신 아예 경보를 꺼버리면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만다. 이는 치솟는 임대료와 전기요금 등 다른 문제들을 단지 가격 동결만으로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정치인들에게 엄중한 경고가 돼야 한다. 물가는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공급, 엄격한 재생에너지 의무 규정이나 모자라는 천연가스 배송관 같은 근본적 문제들이 비용을 밀어올리고 있음을 알려준다. 학생들에게 의례적으로 주어지는 A학점이 대학 생활의 성공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가격 동결 역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문제 해결은커녕 되레 역효과를 내게 된다. 무계획적 주택 건설, 송전선 신설, 혹은 발전 역량 확대가 오히려 이윤을 줄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조란 맘다니 뉴욕시장 당선자와 마이키 셰릴 차기 뉴저지 주지사처럼 당신 역시 공급 측면의 개혁을 가격통제와 짝 지을 수 있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같은 개혁이 아직 이뤄지지 않은 것은 정치인들이 주택 소유주 혹은 새로운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에 반대하는 환경보호주의자 등과 같은 막강한 단체들에 맞서야 했기 때문이다.
가격 동결은 이런 싸움에서 이기는 것을 더 쉽게 만들지 않는다. 치솟는 가격에 관해 실질적으로 무언가를 하라는 정치적 압력을 일시적으로 완화해주면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낼 뿐이다. 성적 인플레이션을 통해 교육의 불공정성을 다루거나 가격 동결로 공급 부족을 관리하려는 것은 더 많은 흡연으로 폐암을 치료하려 시도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필요한 극단적인 치료를 받는 것보다 순간적으로 기분은 나아질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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