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 업계의 수십 년 묵은 골칫거리는 화재 위험이다. 1세대 이차전지인 납 축전지의 발명과 함께 시작된 배터리 폭발 및 화재 문제는 3세대 이차전지 리튬 이온 배터리가 상용화된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말끔히 해결되지 않았다.
이같은 오래된 난제를 타파할 기술을 발명한 국내 기업이 있다. 2013년 설립된 스탠다드에너지다. 스탠다드에너지는 2019년 배터리의 주 소재를 리튬이 아닌 바나듐으로 바꾼 배터리를 만들어냈다. 기존 리튬 이온 배터리는 전해액으로 휘발성이 큰 유기성 용매를 써 불에 취약했다. 스탠다드에너지는 바나듐 이온 배터리의 전해액 주성분으로 물을 채택했다. 불이 붙으려야 붙을 수 없는 소재로 배터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김부기 스탠다드에너지 대표는 26일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바나듐으로 이차전지를 만들려는 시도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기존 리튬 이온 배터리에 필적한 에너지 효율 기술을 개발한 것은 전 세계에서 우리가 처음”이라고 강조했다.
기존 바나듐 배터리 단점 획기적으로 개선
스탠다드에너지가 바나듐 이온 배터리를 발명하기 전 바나듐을 소재로 한 이차전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존에는 바나듐 플로우 배터리가 있었다. 바나듐을 물에 녹여 이온화해 전기 에너지를 저장한다는 바나듐 이온 배터리의 기본적인 저장 원리는 바나듐 플로우 배터리에서 따온 것이다. 문제는 효율성이었다. 배터리 내에 물이 가만히 고여있으면 배터리가 제 기능을 내지 못한 채 배터리 부품 수명만 갉아 먹는 단점이 있다. 이 때문에 펌프를 이용해 물을 강제로 유동시켜야 했다. 전력 공급 장치인 배터리에 전기를 잡아먹는 펌프가 내재해 있으니 전력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배터리에 충전된 전기를 100% 가깝게 출력해야 상품성이 있는데 바나듐 플로우 배터리의 효율성은 70% 내외에 머물렀다.
김 대표는 “우리가 발명한 이 기술은 바나듐과 특정 소재를 조합했고 이 소재 조합이 배터리 양극과 음극 사이에서 미세하게 유동하기에 펌프가 필요 없다”고 설명했다. 바나듐을 포함한 소재 조합을 물에 녹이고 이 전해액을 배터리 내 전도를 띤 다공성 소재에 함침(含浸)시킨 게 스탠다드에너지의 배터리다. 펌프가 달리지 않는 바나듐 이온 배터리의 에너지 효율성은 약 97%다. 리튬 이온 배터리의 에너지 효율성이 95~98% 수준이다.
펌프 없이도 미세 유동을 가능하게 만든 소재 조합을 묻자 김 대표는 “꼭 지켜야 할 영업 비밀”이라면서 “이미 바나듐 이온 배터리 관련 특허를 347개 보유하고 있는데 회사의 실제 기술의 10% 정도만 특허로 공개한 것”이라고 귀띔했다.
김 대표는 가로 14㎝ 세로 14㎝ 정사각형 모양의 배터리 셀을 들고선 “안전과 효율성에 이어 중요한 게 배터리 수명”이라며 말을 이었다. 그는 “배터리 사용 환경에 따라 다르겠지만 리튬 이온 배터리 수명이 길게 잡으면 충·방전 1만 회”이라면서 “이마저도 완전 충전과 완전 방전을 지양해야 1만 회 정도의 수명이 나온다”고 말했다. 이어 김 대표는 “스탠다드에너지의 배터리는 테스트상 완전 충·방전 기준 10만 회 이상도 가능하다”며 “리튬 이온 배터리와 비교해 전력 효율은 비슷하고 제품 수명은 더 길어 뚜렷한 사업적 장점을 확보한 셈”이라고 평가했다.
안전·효율성·저비용 내세워 ESS 시장 도전장
스탠다드에너지는 바나듐 이온 배터리를 무기로 삼아 에너지저장창지(ESS) 시장에 뛰어들었다. ESS의 상품 가치를 따지는 중요한 척도는 전기 에너지 저장의 효율성과 운영 비용이다. 바나듐 이온 배터리가 리튬 이온 배터리 대비 제품 수명이 긴 데다 화재 위험도 적은 만큼 운영 및 유지 비용이 적게 든다는 게 김 대표의 설명이다.
김 대표는 “고출력·고성능 ESS 사업에 집중하고자 한다”며 “바나듐 이온 배터리가 모든 용도에 다 우수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 분야에선 경쟁력이 충분하다”고 자신했다. 이어 “인공지능(AI) 전력 시스템, 대규모 전력 공급이 필요한 전기차 충전 인프라 등이 고출력·고성능 ESS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고 부연했다.
스탠다드에너지는 2년 전부터 바나듐 이온 배터리와 ESS를 일부 고객사에 납품하기 시작했다. 현대건설과 롯데건설이 대표적인 스탠다드에너지의 ESS 고객사다. 대전교통공사는 올해 7월 대전 구암역에 스탠다드에너지의 ESS를 설치했다. 김 대표는 “고객사들의 공통된 반응은 ‘화재 걱정을 안 해서 마음이 놓인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화재 위험이 전무하니 고객사가 체감하는 심적 안정감이 크다는 게 김 대표의 설명이다. 김 대표는 “'ESS 설치 후 피할 수 없었던 건물의 비효율적 사용이 줄었다’는 피드백도 있다”고 덧붙였다. 기존에는 ESS의 화재 위험을 고려해 방화벽으로 둘러싸인 별도 공간을 마련해야 했는데 바나듐 이온 배터리로 구성된 ESS는 화재 위험이 없어 설치 제약에서 한층 벗어난다.
지난 2년 간의 시범적인 상용화 단계를 밟은 스탠다드에너지는 내년부터 본격적인 제품 대량 생산에 돌입한다. 회사는 최근 본사 사무실이 있는 대전 공장에 바나듐 이온 배터리 자동화 생산 라인 구축 마무리 단계를 밟고 있다. 이 라인은 내년 초부터 가동돼 한 해 동안 라인 1개당 최대 1억 7000만 개의 배터리 셀을 양산할 계획이다.
이날 김 대표는 바나듐 이온 배터리 생산 라인을 다른 회사에 구축하는 신사업도 예고했다. 그는 “이미 리튬 이온 배터리 기업 중에 우리의 바나듐 이온 배터리 생산 라인을 실사한 곳도 있다”고 언급했다. 이어 “배터리 기업들이 에너지 기업으로 전환을 꾀하고 있는데 ‘배터리로 에너지 사업을 하기 위해선 리튬 한 가지 소재만으로 제품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있다”며 경쟁사일 수 있는 리튬 이온 배터리 개발사들이 스탠다드에너지의 바나듐 이온 배터리 제조 공정과 공동사업에 관심을 두는 이유를 전했다. 그는 “2027년 이후엔 생산 라인 구축이 우리의 새로운 사업 모델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외형 확장 대신 기술 혜택 확산에 초점
세계 최초 바나듐 이온 배터리 양산을 앞둔 김 대표는 사업 확장 대신 기술 확산에 집중하고 싶다는 뜻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회사 외형만 키우기보다는 바나듐 이온 배터리가 시장에 빠르게 퍼질 수 있도록 방법을 모색하겠다는 의중이다. 김 대표는 “12년 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MIT) 박사 출신들이 모여 이 회사를 창업한 이유가 ‘우리 손으로 직접 좋은 기술을 만들어 최대한 많은 이들이 기술의 이점을 누리게 하자’는 열망에서 비롯됐다”며 “아직 스탠다드에너지의 큰 방향성은 12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다”고 말했다.
이어 “바나듐 이온 배터리 생산 공정을 꼭꼭 감추지 않고 생산 라인 자체를 사업화하는 것도 마찬가지”라며 “우리가 제품을 배타적으로 조금씩 생산하기보다 바나듐 이온 배터리를 시장에 더 빠르게 공급될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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