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 초 로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시기 동정 순교자 아그네스를 주제로 한 그림이 1905년 마지막 라파엘전파로 알려진 영국 화가 프랭크 카도건 카우퍼에 의해 그려졌다. 그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3세 되던 해 성녀 아그네스는 로마 고위 관리 아들이 요청한 순결 서약 포기를 거절한 대가로 고발돼 알몸 상태로 사창가로 보내졌다. 그녀의 순결을 짓밟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신앙을 조롱하기 위해서였다.
전승에 의하면 아그네스가 내던져진 사창가에 기적이 일어났다. 그녀의 머리털에 신성(神性)이 임하자 온몸을 덮어 보호할 만큼 왕성하게 자라났다. 그녀의 기도는 천상의 빛이 돼 그녀를 범하려는 남자들의 시력을 앗아갔다. 그 광휘가 얼마나 강렬했던지 그녀의 방 근처에만 다가서도 두려움으로 사지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였다. 그녀에게 청혼했던 관리의 아들은 그녀를 범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카우퍼는 화폭의 오른쪽 상단부에 이 그림의 진정한 주제를 배치한다. 카우퍼의 재능이 십분 발휘되는 두 화점(火點)에 주목하자. 첫째는 천천히 하강하는 천사의 ‘불쌍히 여기는 시선’과 아그네스의 ‘위로 향한 경외의 시선’이 대각선으로 교차되도록 한 것이다. 둘째는 푸른 십자가 장식이 있는 휘장과 구원을 의미하는 천사의 붉은 옷자락이 섬세하게 펄렁이도록 함으로써 천상의 신비로운 바람결이 이 실존의 비참성을 감싸안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표현해낸 대목이다. 천사는 순결과 은총을 상징하는 ‘빛나는 흰옷’을 아그네스에게 건넨다. 인간에게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온화한 표정으로, 아그네스의 시련과 언약에의 충실함이 하늘나라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방식으로 기록됐음을 고지해 준다.
역사는 생각만큼 크게 변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기원전 870년께의 사건이다. 북이스라엘의 포악한 이세벨 여왕에게 쫓겨다니다 탈진한 엘리야 선지자가 로뎀나무 아래서 기도한다. “이제 그만 내 생명을 거두소서.” 그때 하늘로부터 천사가 내려와 그에게 떡과 물을 주면서 ‘일어나 먹고’ 힘을 내라고 한다. 이 시대도 다르지 않다. ‘일어나 먹고 힘을 내야 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천사들이 여전히 하강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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