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최신 그래픽처리장치(GPU)인 ‘블랙웰’을 26만 장이나 한국 정부와 기업에 공급할 것이라고 예고한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내수로만 돌리겠다는 발언을 해 그 진의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블랙웰을 중국에만 유출하지 말라는 미국 정치권 요구에 갑자기 한국과 같은 동맹국에도 수출을 금지하겠다는 듯한 언급을 내놓았기에 국내 반도체 업계도 잔뜩 긴장하는 분위기다. 자칫 한국에서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킨 황 CEO와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회장, 정의선 현대차(005380)그룹 회장 간 이른바 ‘깐부 치맥(치킨과 맥주) 회동’ 열풍에도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블랙웰 수출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추가 입장에 따라 각각 11만 원, 60만 원을 넘어서며 코스피지수 4200 돌파를 이끈 삼성전자, SK하이닉스(000660)의 주가도 한 동안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세계 최초로 5조 달러를 넘어선 엔비디아의 시가총액도 마찬가지다.
중국에만 주지 말라니까…트럼프 “엔비디아 최첨단 칩 다른 나라에도 안 줘”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31일(현지 시간) 녹화돼 2일 방영된 CBS의 시사 프로그램 ‘60분’ 인터뷰에서 ‘중국에 최첨단 반도체들을 팔도록 엔비디아를 허락할 것이냐’는 진행자 질문에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우리는 중국이 엔비디아와 그 문제를 처리하도록 할 것”이라고 애매한 답변을 내놓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어 “하지만 최첨단에 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며 “최첨단은 미국 말고는 누구도 갖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중국을 제압하는 것보다 협력함으로써 우리는 더 강해질 수 있다”며 “2년 안에 우리는 반도체 시장의 40~50%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2일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워싱턴DC로 돌아오는 전용기 안에서도 취재진과 만나 같은 입장을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막 나온 새 블랙웰은 다른 모든 반도체보다 10년 앞서 있다”며 “다른 사람(국가)들에게 그것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중국 뿐 아니라 모든 나라에 엔비디아 블랙웰을 팔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발언으로 읽히는 대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블랙웰 관련 발언은 이를 중국과의 협상 수단으로 쓸 수 있다고 했던 기존 입장에 선을 긋기 위한 차원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희토류에 대항하는 미국의 독보적인 기술인 엔비디아의 최신 GPU조차 미중 협상의 거래 품목으로 삼을 수 있다고 했다가 자국 내에서 강한 역풍을 맞은 탓이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동하는 전용기에서 취재진과 만나 블랙웰 문제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논의할 것이라며 이에 대한 수출 허용까지 중국과의 협상판에 올려놓을 수 있다고 시사했다. 중국 기업들은 미중 무역 갈등 전에도 블랙웰이나 ‘H100’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H20’ 칩만 엔비디아에서 구매할 수 있었다. 미국이 이른바 ‘관세 휴전’ 과정에서 희토류 수출 재개에 대한 대응 차원으로 H20 수출 제한 조치를 해제했지만, 중국은 자존심을 지키겠다며 이를 수입하지 않고 자체 인공지능(AI) 칩 개발에 매진하는 상황이다.
미중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나온 트럼프 대통령의 블랙웰 관련 발언에 미국 정치권은 뒤집어졌다. 심지어 공화당에서 중국과의 블랙웰 거래에 강렬하게 반대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 연방 하원 미중전략경쟁특별위원회의 존 물레나(공화·미시간) 위원장은 29일 X(옛 트위터)에 “적성국에 최신형 첨단 AI 칩을 판매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행정부에 전달했다”는 글을 올렸다.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상원의원 11명도 트럼프 대통령에게 무역 합의를 빌미로 중국에 AI 반도체 수출 제한을 해제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30일 부산 미중 정상회담 직후 귀국길 전용기 안에서 취재진과 만나 “막 나온 블랙웰은 논의하지 않았다”고 물러섰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칩에 대해 논의했고, 중국이 엔비디아나 다른 기업들과 반도체 공급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며 “황 CEO와 얘기하겠지만 중국이 엔비디아와 협의해서 할 수 있을지 그렇지 않을지를 보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삼성·현대차·SK(034730)·네이버 기대 부풀었는데…젠슨 황의 블랙웰 26만 장 공급 계획 ‘불안’
미국 정치권이 중국에 대한 블랙웰 수출을 극도로 꺼리는 것은 단순한 무역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첨단 AI 기술은 안보 문제와도 직결되기에 중국이 해당 AI 칩으로 군사력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블랙웰은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반도체 아키텍처(설계 구도)로 이를 기반으로 한 칩의 성능은 이전 세대 제품인 H100보다 몇 배 나 더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때문에 미국 정치권은 엔비디아가 블랙웰 아키텍처 기반의 H20의 후속 모델 ‘B30A’를 중국 시장에 수출하려는 계획조차도 상당히 께름칙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문제는 미국에 대한 안보 위협 가능성이 전혀 없는 한국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블랙웰 수출 통제 조치가 군사 동맹 관계인 한국까지 미칠 경우 이는 부당한 조처라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앞서 엔비디아는 황 CEO는 지난달 말 ‘APEC CEO 서밋’ 행사를 계기로 한국 정부와 삼성전자, SK그룹, 현대차그룹, 네이버(NAVER(035420))클라우드 등에 총 26만 장의 GPU를 공급하기로 발표한 바 있다. 엔비디아가 한국에 공급하기로 한 GPU 26만 장은 최신 ‘GB200 그레이스 블랙웰’이 다수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RTX 6000 시리즈’도 일부 혼합된다. 당시 엔비디아는 “새로운 블랙웰 인프라로 한국의 전체 AI GPU 수량이 6만 5000개에서 30만 개 이상으로 증가할 것”이라며 “한국은 세계적 수준의 AI 리더가 될 토대를 마련하게 됐다”고 장담했다. 황 CEO가 한국을 찾은 것은 지난 2010년 이후 15년 만이었다.
엔비디아가 공급하겠다고 한 GPU는 최대 14조 원에 달하는 규모다. AI 광풍이 전 세계적으로 부는 상황에서 품귀 현상을 보이는 엔비디아 GPU의 대량 확보는 한국 입장에서 중대한 쾌거로 평가됐다. 엔비디아는 국내 기업들과 6세대(6G) 이동통신, 의료, 양자컴퓨팅 부문에서도 폭넓게 협력하기로 했다.
특히 삼성전자는 5만개의 GPU를 탑재한 업계 최대 수준의 ‘반도체 AI 팩토리’를 엔비디아와 구축해 제조 혁신을 실시하기로 했다. 오픈소스 기반 대형언어모델(LLM)인 네모 트론, 쿠다-X, 옴니버스 등 엔비디아의 플랫폼을 활용해 반도체 제조 속도와 수율을 개선하는 디지털 트윈도 구축한다. 또 엔비디아 코스모스와 아이작 로보틱스 플랫폼을 이용한 차세대 가정용 로봇 개발에도 착수했다. 이 회장은 “엔비디아는 이미 AI 시대를 내다본 혁신 기업”이라며 “앞으로도 엔비디아와 함께 변화를 주도하고 미래를 위한 새로운 표준과 혁신을 앞당기겠다”고 다짐했다.
SK그룹도 엔비디아 GPU를 활용한 AI 팩토리를 설계한다. SK텔레콤(017670)은 엔비디아 RTX 프로 6000 블랙웰 서버 에디션 GPU를 활용해 국내용 소버린 AI 인프라를 제공할 방침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엔비디아와 AI를 국내 산업 전반의 혁신을 이끄는 엔진으로 만들고 있다”며 “엔비디아 AI 팩토리를 기반으로 차세대 메모리, 로보틱스, 디지털 트윈, 지능형 AI 에이전트를 구동할 기반을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현대차도 엔비디아와 블랙웰 AI 팩토리를 구축하고, 정부와 국내 피지컬 AI 분야 확장을 위해 30억 달러(약 4조 3000억 원)를 공동 투자하기로 했다. LG(003550)그룹도 로보틱스와 의료 분야에서 엔비디아와 파트너십을 맺는다.
황 CEO는 31일 경북 경주 예술의전당 원화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치맥 브라더스(형제들)’라고 칭하며 “장기적인 협력 관계가 돼 HBM4, HBM5, HPM97까지도 함께 개발할 것”이라고 밝혔다. 황 CEO는 30일에도 이 회장, 정 회장과 서울 삼성동의 한 치킨집에서 소탈한 맥주 회동을 갖고 한국 기업과의 끈끈한 우애를 과시했다. 이들은 같은 날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엔비디아 GPU ‘지포스’ 출시 25주년 행사에서도 나란히 무대에 올랐다. 이 회장이 이 자리에서 “그런데 왜 이렇게 아이폰이 많아요”라며 던진 농담은 온라인 상에서 인기 몰이를 하기도 했다.
트럼프 입에 달린 블랙웰의 미래…‘獨 GDP 추월’ 엔비디아 시총에도 영향 줄 듯
트럼프 대통령의 전방위 블랙웰 수출 통제 범위가 어디까지 적용되는지에 대해서는 주요 외신과 반도체 업계에서도 아직 설왕설래만 하는 분위기다. 자칫 잘못하면 트럼프 대통령이 황 CEO가 약속한 블랙웰 수출까지 한미 관세 후속 협상의 합의 카드로 내밀 수 있다는 걱정도 있다.
무엇보다 트럼프 대통령의 더 구체화된 입장은 엔비디아, 삼성전자, 현대차, SK하이닉스 등 뉴욕과 한국 증시에도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엔비디아의 시총은 현재 세계 3위 경제대국인 독일의 국내총생산(GDP)보다도 커진 상태다. 29일 주가가 사상 최고치를 재경신하면서 시총은 5조 311억 달러까지 불어났다. 미국 에너지부에 AI 슈퍼컴퓨터 7대 구축, 핀란드 노키아의 6G 기지국에 자사 칩 탑재 계획 등이 초대형 호재가 됐다. 삼성전자, 현대차에 대한 칩 공급도 주가를 밀어올리는 재료가 됐음은 물론이다.
전 세계 증시에서 시총 5조 달러를 넘은 기업은 엔비디아가 역사상 처음이다. 엔비디아는 지난 7월 10일 시총 4조 달러 벽을 최초로 넘어선지 불과 3개월여 만에 1조 달러를 더 불렸다.
엔비디아는 3일에도 시총 5조 달러를 회복해 2위 애플(3조 9758억 달러)과 1조 달러 이상 격차를 유지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엔비디아 칩을 아랍에미리트(UAE)에 수출할 수 있는 허가를 지난 9월 미국 상무부에서 받았다는 소식이 훈풍을 불렀다. 이 허가로 마이크로소프트는 UAE에 엔비디아 칩 ‘A100’의 6만 400개 용량에 해당하는 GPU를 수출할 수 있게 됐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독일의 명목 GDP가 5조 1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엔비디아의 기업 가치는 네덜란드, 스페인, 아랍에미리트(UAE), 이탈리아, 폴란드 증시 전체 시총을 합친 것보다 더 크다.
한국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도 최근 11만 원, 60만 원 선을 돌파하며 연일 신고가를 다시 쓰고 있다. 엔비디아의 AI 생태계에 장기적으로 확실하게 편입될 것이라는 기대가 최대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앞으로 나올 트럼프 대통령의 말 한 마디가 글로벌 금융 시장에서 천문학적인 금액을 오가게 할 상황을 맞은 셈이다.
※'트럼프 스톡커(Stocker)'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대에 투자에 도움이 될 만한 미국의 시장·기업·정책·정치·외교 관련 현장 이야기와 현안 분석을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구독하시면 유익한 미국 소식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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