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 인도 벵갈루루에서 유엔 후원으로 전 세계 40여 개국 최고법관들이 참여하는 사법그룹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법관들이 지켜야 할 윤리와 행동 준칙으로 독립성, 공정성, 청렴, 품위, 평등, 능력·성실성 등 6대 핵심 가치를 담은 초안을 마련했다. 이른바 ‘벵갈루루 법관행동 준칙’은 2002년 채택돼 2006년 유엔에서 공식 승인됐다. 이 준칙은 사법 윤리를 인권의 일부로 확립한 첫 국제 문서로 전 세계 판사들의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흥미로운 점은 벵갈루루 준칙의 핵심 가치들을 서구권이 아닌 아프리카·아시아권 법관들이 주도해 마련했다는 점이다. 선진국 법관들은 사법 제도가 안정돼 있었기 때문에 전문성이나 업무 효율성, 겸직 금지 등 세부 윤리 강령 마련에 관심이 많았다. 반면 아프리카 법관들에게는 정치 권력 압력과 절차적 투명성 부족, 사법부 내부 부패 등의 해결이 더 시급한 과제였다. 사법부 독립과 공정성을 강조하는 국제 준칙을 앞세워 자국 내 삼권분립과 국민적 신뢰를 확보하려 한 것이다. 준칙에 ‘정의는 실현돼야 할 뿐 아니라 실현된 것으로 보여져야 한다’는 유명한 영국 법언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우리 대법원이 2007년 제정한 ‘법관윤리강령’도 벵갈루루 준칙을 모델로 삼았다. 법관윤리강령 제4조 5항은 ‘법관은 교육이나 학술 또는 정확한 보도를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구체적 사건에 관하여 공개적으로 논평하거나 의견을 표명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전국법관대표회의는 올해 5월 진보 성향 법관들의 요구로 열린 임시 회의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 대해 의견을 내지 않는 근거로 벵갈루루 준칙을 들었다. 이런데도 최근 민주당 의원들은 법원장들에게 12·3 계엄을 내란으로 단정하라고 윽박지르고 조희대 대법원장을 내란 동조 세력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대법원장이나 법원장이 법관윤리강령을 어기고 일선 재판에 개입하라는 것이다. 어쩌다 우리나라가 1990년대 아프리카처럼 재판 독립을 고민해야 할 처지로 몰렸는지 한숨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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