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신라의 천년 고도 경주에서 개최된다. 신라는 태생적으로 개방과 교역을 중시하는 DNA를 지닌 무역 강국이었다.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고 주변국과 활발히 교류했으며 이를 통해 축적한 경제력과 외교 네트워크는 삼국 통일의 기반이 됐다.
당대의 개방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인물은 해상왕 장보고였다. 그는 동아시아와 아라비아 상인을 잇는 해상 실크로드를 개척해 신라뿐 아니라 주변국 모두에 공동 번영의 길을 열었다. 이러한 신라와 장보고의 정신은 APEC이 추구하는 가치이자 올해 주제인 ‘연결·혁신·번영’ 속에 녹아 있다.
천년 전 신라의 DNA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빛을 발했다. 1965년에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08달러, 무역액은 6억 달러에 불과했다. 우리는 최빈국의 길목에서 개방과 무역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기적을 만들어냈다. 2024년 기준 1인당 GDP는 300배 이상, 무역액은 2000배 이상 확대되며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무역 강국으로 도약했다.
이 성장 스토리는 APEC의 여정과도 닮아 있다. 아태 지역은 1989년 APEC 출범과 함께 무역·투자 자유화 흐름에 힘입어 10억 명 이상이 빈곤에서 벗어났다. 세계 최대 경제협력체가 된 APEC은 전 세계 GDP의 61%, 교역의 49%를 차지한다. 이제 APEC은 새로운 경제 번영의 모멘텀을 만들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한국은 올해 의장국으로서 30일 개최되는 외교통상합동각료회의에서 세 가지 협력 방향을 제시한다.
첫째, 개방적 복수국 간 협력 강화이다. 세계무역기구(WTO) 중심의 규범 기반 다자 무역 체제가 여전히 세계 통상 질서의 핵심 축이지만 이를 보완할 유연한 협력 모델이 필요하다. APEC은 비구속적·자발적 협력을 토대로 새로운 통상 규범의 실험장이 돼왔다. 브루나이·칠레·뉴질랜드·싱가포르가 참여한 P4 협정이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으로 발전하고 2012년 환경 상품 리스트가 WTO 논의의 기반이 된 것은 모두 APEC의 성과다. 앞으로도 APEC이 ‘아이디어 인큐베이터’로서 개방적 복수국 간 협력을 주도해야 한다.
둘째, 디지털과 인공지능(AI) 협력 강화이다. APEC은 전 세계 디지털 서비스 수출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디지털 허브이자 AI 혁신 선도 지역이다. 한국은 올해 5월 ‘AI for Trade’ 이니셔티브를 제안해 합의를 이끌었으며, 내년에는 ‘AI for Supply Chain’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이를 통해 공급망 분야에서 역내 개도국과 중소기업 모두가 AI 혜택을 골고루 누리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셋째, 기후변화 대응과 에너지 전환이다. 한국 새 정부는 탄소 중립과 산업 경쟁력 강화를 동시에 달성한다는 비전 하에 재생에너지를 확대하고 AI 기반 스마트 에너지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가속화하고 있다. 아태 지역은 제조업의 허브이자 탄소 크레디트의 수요(선진국), 공급(개도국)이 풍부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역내 협력이 유망하다.
우리는 불확실한 통상 환경, 공급망의 분절화, 기후위기라는 삼중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천년 전 신라가 개방을 선택했듯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글로벌 통상의 파고를 넘어 새로운 협력의 지평을 열 수 있는 21세기의 장보고이다. 대한민국이 2025 경주 APEC을 계기로 더 나은 내일을 위한 경제 번영의 길을 선도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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