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현지 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청 앞 7번가. 우범지대로 악명 높은 지역이지만 이날만큼은 마약에 취한 노숙인 대신 시위대가 거리를 점령했다. ‘트럼프는 당장 사임하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는 시위대 사이에서는 “우리는 왕을 원치 않는다”는 구호가 끝없이 흘러나왔다.
의상과 푯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구는 시위의 명칭인 ‘노 킹스(No Kings)’와 ‘미국에는 1776년(독립) 이후 왕이 없다’였다. 이밖에 ‘트럼프 엿 먹어라(FUCK TRUMP)’ ‘(엡스타인) 파일을 공개하라. 소아성애자를 체포하라’ 등 원색적인 문구가 적힌 푯말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4개월 전 1차 시위보다 공격적인 푯말에서 격화하고 있는 미국 내 갈등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노 킹스 2.0’으로도 불리는 이번 시위는 6월 14일 첫 시위에 이은 두 번째 대규모 ‘반(反)트럼프’ 집회다. 6월 시위는 도널드 트럼프 생일맞이 ‘열병식’이 촉발했다. 이번 시위의 트리거는 이민단속국(ICE)의 불법 이민자 단속과 이를 명분으로 파병된 주방위군이다. 시카고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에 참석한 배우 존 큐잭은 “트럼프 당신은 우리 거리에 군대를 투입할 수 없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반란 진압법을 발동할 만큼 혼란을 일으킬 수도 없다”고 외쳤다.
최근 트럼프가 주방위군 투입을 추진 중인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반발 기류가 확연했다. 지난주 주방위군 투입 고려에 ‘찬성’ 반응을 내놨다가 거센 비판에 사과한 마크 베니오프 세일즈포스 최고경영자(CEO)에 대한 언급이 나오자 시위대 사이에서는 야유가 터져 나왔다. 연단에 오른 미쉘 구티아레즈 보 캘리포니아 간호협회장은 “인공지능(AI)이 사람을 대체하는 시대가 오기 전에 기술계의 폭주를 막아야 한다”고 외쳐 박수 갈채를 받았다. 미 민주당 주요 정치인들은 시위에 직접 참석하거나 온라인 메시지 등을 통해 힘을 보탰다. 척 슈머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X(옛 트위터)에 “오늘의 ‘노 킹스’ 시위는 미국의 본질에 대한 확증이다.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라고 썼다. 미국 진보 진영의 대부로 꼽히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워싱턴DC 집회에 나와 “트럼프 집권 아래 미국은 위기에 처했다”면서도 “결국 우리 국민이 통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시위는 하와이부터 트럼프 대통령의 고향인 뉴욕, 수도 워싱턴DC까지 50개 주 2700여 곳에서 진행됐다. 유럽 각지 주요 도시 명소나 미 대사관 앞에서도 연대 시위가 벌어졌다. 주요 외신들은 2000여 곳에서 열렸던 첫 시위에 500만 명이 참석했다는 점에 미뤄볼 때 이번에는 참여 규모가 더욱 커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대규모 시위에도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은 조롱 섞인 태도를 보여 빈축을 샀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트루스소셜에 왕관을 쓴 자신이 ‘트럼프 왕’이라 적힌 전투기를 타고 시위대에 오물 폭격을 뿌리는 합성 영상을 올렸다. J D 밴스 부통령은 ‘왕에게 경배하라(Hail to the king)’는 가사가 흘러나오는 음악을 배경으로 시민들이 트럼프에게 무릎을 꿇는 영상을 게시했고 트럼프는 이를 공유하기도 했다.
마이크 존슨 연방하원 의장 등 공화당 지도부는 며칠 전부터 시위대에 ‘공산당’ ‘하마스 지지자’ ‘자본주의 증오’ ‘마르크스주의자’ 등 비난 발언을 이어갔다. 공화당 소속인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는 오스틴 시위에 앞서 “텍사스 공안부와 주방위군에 지시를 내려 안전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자원을 배치하도록 했다”는 입장문을 내기도 했다. 텍사스는 공화당 우세주지만 오스틴은 진보세가 강한 도시다.
일부 시위대는 무력한 야당에 분노를 드러냈다. ‘시위가 애국이다(Protest is patriotic)’라는 문구를 들고 나온 한 여성은 “트럼프 당선 후 미국이 세계의 공적이 돼 부끄럽다”면서도 “트럼프가 파시스트와 다름없이 행동하는데 의회 양당이 독재를 돕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샌프란시스코크로니클은 이날 행진에 동행한 민주당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에게 시위대 일부가 “은퇴하라”며 야유를 보냈다고 전했다. 펠로시는 샌프란시스코에서만 내리 20선을 이어온 ‘지역 유지’다. 트럼프 정권을 견제하지 못하고 무력한 모습을 보이는 민주당에 ‘반트럼프’ 시위대조차 냉소적인 반응을 나타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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