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을 보장하는 주 35시간 근무제와 칼퇴근 문화, 넉넉한 연금이 뒷받침하는 안정된 노후, 국가가 모든 국민의 출산부터 육아·교육·주거·의료·실업까지 책임지는 관대한 복지국가. 능력주의와 경쟁의 고단함에 갇힌 한국 직장인의 눈에 프랑스는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견고한 줄만 알았던 프랑스의 복지 시스템은 알고 보니 나랏빚으로 부풀려 온 시한폭탄이었다. 유럽에서도 유독 후한 프랑스의 복지·연금 모델은 달라진 경제 환경이 초래한 저성장과 고령화 추세에서 어느덧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 됐다.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사회보장에 지출하는 프랑스의 국가부채는 GDP의 115.6%로 불어났고 재정적자는 유럽연합(EU)의 재정 규칙 기준인 3%를 한참 웃도는 GDP의 5.8%로 치솟았다. 물론 여기에는 재정 형편을 고려하지 않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감세 정책도 한몫했다.
나라 살림이 거덜나자 정치와 경제는 사달이 났다. 정부가 재정난 타개를 위한 극약 처방으로 내놓은 긴축 예산안은 가뜩이나 분열됐던 정치를 뒤흔들고 민심에 불을 질렀다. “이곳이 절벽 전 마지막 정거장”이라며 440억 유로(약 74조 원)의 예산 절감을 추진한 프랑수아 바이루 전 총리는 의회의 불신임으로 축출됐다. 후임인 세바스티앵 르코르뉘 총리는 27일 만에 초고속 사임했다가 나흘 만에 재임명되는 촌극의 주인공이 됐다. 긴축 반대 시위와 노조 파업이 전국을 휩쓸며 나라는 사실상 마비됐다. 마크롱 대통령은 정치적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핵심 공적인 연금 개혁을 양보하겠다고 물러섰다. 개혁 후퇴가 그의 정치 생명을 이어줄지는 미지수이지만, 재정을 더 벼랑 끝으로 밀어놓을 것은 확실해 보인다. EU 2위 경제 대국인 프랑스는 사면초가에 놓인 ‘유럽의 병자’ 신세가 됐다.
아수라장이 된 프랑스에서 가장 억울한 이는 리더십 위기에 봉착한 마크롱 대통령도, 재정 정상화를 추진하다가 쫓겨난 총리도 아닌 평범한 시민 ‘니콜라’다. 니콜라는 열심히 일해서 세금을 내며 국가 복지 시스템과 은퇴한 베이비붐 세대의 노후를 떠받치고 있는 프랑스의 30대를 상징한다. 월급의 절반을 세금으로 떼이고도 정작 자신은 넉넉한 연금과 복지 혜택을 누리기 어렵게 된 비운의 세대이기도 하다. 프랑스 소셜미디어에서는 작업복을 입은 니콜라가 크루즈선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70대 은퇴자들을 위해 돈을 대느라 괴로워하는 모습을 담은 ‘니콜라가 돈을 낸다(Nicolas Qui Paie)’ 밈(meme)이 화제다. 연금 개혁이 후퇴하면 그 재정 부담을 메우는 것도 니콜라의 몫일 것이다. 이제 니콜라는 정부와 부모 세대를 향한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프랑스의 현실은 제아무리 잘 사는 선진국이라도 일단 재정 중독과 ‘복지병’에 빠지면 경제 파탄을 맞을 수 있다는 묵직한 경고다.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한국의 재정 상황은 프랑스보다 훨씬 양호하지만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가파른 저출산·고령화 속도 때문에 복지 지출이 급증하고 재정 부담도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러 기관들이 전망하는 우리의 미래는 지금의 프랑스보다 암울하다.
이재명 정부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재정이 성장의 마중물’이라고 규정한 이 대통령은 “봄에 뿌릴 씨앗이 없으면 가을 수확을 위해 빌려다 씨를 뿌려야 한다”고 했다. 기획재정부는 이 대통령의 확고한 확장 재정 기조에 발맞춰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을 GDP의 3% 이내로 관리하는 재정준칙 규정을 사실상 폐기하고 완화된 새 규칙을 마련하고 있다.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전 세계 122개국이 도입한 재정준칙 도입도 끝내 외면할 태세다.
우리나라에서 2000년대 들어 태어난 아기에게 가장 많이 지어준 이름은 민준이였다. 출생아 성비를 감안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민준이는 저성장 경제에서 일자리 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오늘날의 청년이자, 장차 방만한 재정의 대가를 치러야 할 수 있는 세대이기도 하다. 기재부 전망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GDP 대비 국가부채비율은 올해 49%에서 민준이가 노년기로 접어드는 2065년에는 156%로 급등한다. 보건복지부는 국민연금 재정이 완전히 고갈돼 2065년부터는 국민연금을 세금처럼 운영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민준이는 미래가 불안하다. 재정 고삐를 마냥 풀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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