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이후 서울역 앞 남산 언덕배기에는 조그만 판잣집이 하나둘 들어섰다. 볕이 잘 들어 양동(陽洞)으로 불린 이 동네에는 힘겹고 고된 도시 빈민들이 모여들어 터전을 일궜다. 개발 열기를 등에 업고 경쟁적으로 고층 빌딩들이 올라가는 동안에도 60년 넘게 소외된 사람들의 쪽방촌으로 남아있던 이곳에 최근 새로운 보금자리가 들어섰다. ‘공공임대주택 해든집’이다.
14일 서울시에 따르면 중구 남대문로5가 580번지 일대에 18층 규모의 ‘해든센터’가 들어섰다. 이곳은 2021년 2월 정비계획 결정 후 기부채납을 받아 4년 만에 준공됐다. 센터의 핵심 공간은 지상 6~18층에 마련된 해든집이다. ‘해가 뜨는 집, 희망이 스며드는 집’이라는 뜻이 담긴 해든집은 전용 14.21㎡ 174가구와 20.71㎡ 8가구를 갖췄다. 9월 초 입주를 시작해 현재 142가구가 입주를 마쳤다.
입주자는 남대문 쪽방 주민. 대개는 개발 대상지를 일괄적으로 전면 철거하거나 입주민을 강제 이주시킨 뒤 개발에 들어가는 식으로 진행되지만, 이곳은 달랐다. 이주민이 거주할 수 있는 임대주택을 먼저 마련한 뒤 이주를 마치면 기존 건물을 철거하는 ‘민간 주도 순환정비’ 방식을 택했다.
순환정비는 일반적으로 사업 시행자가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추가 비용이 발생하며 정비기간이 길어진다는 이유 때문이다. 개발이 논의될 무렵 주민들은 모임을 꾸려 주거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시청, 구청 등을 찾아가 절박함을 호소하기를 여러 번. 서울시는 쪽방 밀집 지역과 거주민의 특수성 등을 감안해 자치구와 사업 시행자, 전문가 등과 여러 차례 논의를 진행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이곳은 민간 주도 순환정비의 첫 사례”라며 “‘선(先)이주-선(善)순환’ 모델로 서울시의 철학인 ‘약자와의 동행’을 실천했다”고 설명했다.
현재 ‘영등포 쪽방촌’도 유사한 방식의 정비가 진행 중이다. 쪽방 주민들이 현재 거주하는 지역에 들어서는 임대주택으로 이주를 마치면, 개발하는 식이다. 현재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서울주택도시공사(SH) 등의 사업 시행자가 토지 등 보상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해든집에 입주한 주민들은 기대감을 내비쳤다. 평생을 단칸방에서 지냈다는 권모 씨는 “인생 처음으로 새 건물에서 산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둥둥 뜬다”며 “앞으로 형편이 된다면 조금씩 기부하며 살겠다”고 말했다.
해든센터의 다른 공간인 지하 3층~지상 5층에는 사회복지시설과 편의시설이 들어선다. 그동안 숭례문 인근에 위치해 중림동과 회현동 쪽방 주민의 생활·간호 상담, 의료·기초생활 지원을 비롯해 자활·자립 지원, 정서 지원, 안전점검 등을 맡아온 남대문쪽방상담소가 해든센터 5층으로 이전했다. 이로써 해든집 입주민의 정착 및 이후 주민 지원도 맡게 됐다.
해든센터에는 입주민의 자립을 위한 시설도 들어설 계획이다. 지하 2층에 마련되는 지역자활센터 공동작업장은 일자리 중 30~40%를 해든집 입주민에 우선 제공한다. 지상 1층에 설치되는 빨래방은 해든집 입주자 및 인근 쪽방 주민에게 할인해 줄 방침이다. 지상 5층의 모두의 주방에서는 남대문쪽방상담소의 정기 요리 프로그램 공간으로 활용될 계획이다. 또 남대문5가 구립경로당도 지상 5층에 입주한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14일 오후 해든집을 방문해 새로운 보금자리를 살펴보고 입주민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함께 현장을 찾은 iM사회공헌재단과 이마트 노브랜드 관계자들도 주민들의 입주를 축하가며 주방용품, 휴지, 세제 등 생필품을 전달했다.
서울시는 향후 해든집 주민의 생활 변화 등에 관한 연구 용역을 추진해, 다른 쪽방 밀집 지역 주민의 안정적인 주거환경 조성과 기반 마련에 활용할 방침이다. 오 시장은 “도시 성장 속에서도 소외되는 이웃이 없도록, 누구에게나 따뜻한 보금자리가 있는 서울을 만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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