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미술관 전시는 작품 사이의 예술적 대화를 이끌어낸다. 다른 시대, 다른 방식으로 그려진 작품들은 각각 완결된 세계를 이루지만 나란히 서는 순간 서로를 비추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최 중인 ‘수련과 샹들리에’는 이런 미덕을 갖춘 전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국제 소장품 1045점 중 엄선한 A급 작품 44점을 만날 수 있는 전시는 19세기 인상파 거장 클로드 모네의 대표작 ‘수련’과 중국 동시대 작가 아이웨이웨이의 설치작 ‘검은 샹들리에’를 제목에 나란히 올렸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의 움직임을 포착하려한 회화와 빛을 삼키는 현대의 조각, 두 작품을 잇는 100년의 미술사가 한 공간 안에서 펼쳐진다.
게오르크 바젤리츠, 도널드 저드, 마르셀 뒤샹, 마르크 샤갈, 안젤름 키퍼, 앤디 워홀 등 현대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쟁쟁한 작가들의 회화, 조각, 사진, 판화 등이 한 자리에 모였다. 작품들은 특별한 주제나 순서 없이 한 점 한 점에 집중하도록 구성됐지만 ‘따로 또 같이’의 매력을 높이는 배치로 눈길을 끈다. 일례로 인체를 둥글고 풍만하게 표현하는 특유의 스타일로 잘 알려진 콜롬비아 출신 작가 페르난도 보테로의 ‘춤추는 사람들’ 앞으로는 보테로 그림 속 인물이 현실로 나온 듯한 니키 드 생팔의 여인상 ‘검은 나나(라라)’가 섰다. 또 살바도르 달리 특유의 초현실주의적 상상력을 느낄 수 있는 ‘켄타우로스 가족’ 옆에는 극적인 연출 사진으로 불안한 여성의 심리를 초현실적으로 표현한 신디 셔먼의 ‘무제’가 자리했다.
시작과 끝도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전시의 문을 여는 작품은 미국 개념미술 작가 바바라 크루거의 사진 ‘모욕하라, 비난하라’이다. 날카로운 바늘이 눈을 찌르려는 순간을 담은 거대한 이미지는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준다. 김유진 학예연구사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을 전복시켜보자는 의미로 시작점에 배치했다”고 설명했다. 문을 닫는 작품은 이탈리아 현대미술가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의 ‘에트루리아인’이다. 고대 복장을 한 에트루리아인이 거울 앞에 선 작품으로 관람객이 감상하려면 나란히 거울 앞에 서야한다는 점이 독특하다. 조각과 함께 서서 작품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관람객에 제공하며 전시의 주제를 강조한다.
전시의 대표작 ‘수련이 있는 연못’은 모네가 백내장을 앓던 말년에 완성한 그림이다. 40여 년에 걸쳐 파리 근교의 작은 마을 지베르니의 자택 연못에 핀 수련을 주제로 25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던 모네의 만년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은 2022년 첫 공개된 뒤 “언제 다시 볼 수 있냐”는 관람객의 문의가 끊이지 않았던 작품이다. 또 다른 표제작 ‘검은 샹들리에’는 인권과 표현의 자유 등을 폭넓게 다루는 중국 출신 현대미술 거장 아이웨이웨이의 작품으로 빛을 발하는 본래 기능을 상실한 검은색 샹들리에를 통해 빛과 어둠, 아름다움과 죽음이라는 대비된 인상을 준다. 인간 두개골과 척추뼈 등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 유리 조각들이 샹들리에를 장식하는 가운데 중국 정부의 검열을 의미하는 ‘화해(和諧, he xie)’와 발음이 같아 작가가 풍자적 의미로 자주 활용하는 ‘민물 게(河蟹·hexie)’도 보인다. 언뜻 아무런 공통점도 없어 보이는 두 작품은 빛과 자연, 어둠과 인공이라는 대비를 완성하며 미술 감상에 재미를 더한다.
이밖에 전시에서는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의 대형 사진인 ‘얼음 위를 걷는 사람들’과 미국 개념미술가 존 발데사리의 채색 사진 ‘음악’도 처음 공개된다. 중국 현대미술 작가 쩡판즈의 ‘초상’ 2점도 지난해 10월 국내 1호 미술품 물납제로 소장된 후 첫 공개된다.
다만 첫 공개되는 작품이 4점밖에 없다는 점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의 국제 컬렉션이 아쉽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1만 1994점 중 해외 작품은 8.7%이며 이중 절반인 595점이 기증으로 이뤄졌다. 이번에 공개된 44점 중 16점도 2021년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에서 나왔다. 김성희 관장은 “연간 소장품 구입비가 47억 원 정도인데 내년에는 40억 원으로 줄어든다”며 “국내 작가 중에서도 소장해야 할 리스트가 긴 상황에서 해외 대작은 기증을 통해 받을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전시는 2027년 1월 3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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