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란하다. 이달 10일 오후 10시에 시작된 북한 노동당 창당 80주년 기념 열병식은 우중에도 그 화려함을 최대한 뽐냈다. 북한 열병식은 2020년 당 창건 75주년 이후 오후 6시에서 자정 사이에 열리는 야간 행사로 정착했다. 어두운 밤하늘을 무대로 삼은 ‘극장 국가’ 북한의 대표적 정치 쇼이다. 아직 정확한 동원 규모는 확인되지 않지만 이번 열병식은 역대 최대 수준으로 평가된다. 적어도 50개 이상의 중대 규모 병력과 평양 시민 수만 명이 동원된 것으로 파악된다. 최소 6개월 이상 준비했고 행사 당일에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12시간 이상 대기했다고 한다. 북한식 ‘노력 동원’의 극치다.
북한의 열병식은 단순한 군사 행진이 아니다. 체제의 본질과 정치적 메시지를 압축해 하나의 서사로 구성한 종합 정치극이다. 특히 9월 9일 정권수립일(국경절)보다 10월 10일 당 창건일에 훨씬 큰 비중을 두는 것은 북한 권력 구조의 본질을 보여준다. 북한은 국가보다 당이 우위에 있는 체제다. 헌법 서문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노동당의 영도 밑에 세워진 국가’라고 명시돼 있다. 국가는 당의 정책을 집행하는 행정 도구에 불과하다. 북한이 당을 절대화하는 이유는 세습 체제의 정통성과 직결된다.
열병식에는 1930년대 김일성의 빨치산 투쟁을 상징하는 제7종대가 등장한다. 북한은 이를 통해 ‘무력의 기원’을 김일성에게 두고 그가 당을 먼저 창건한 후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혁명의 제도적 완성을 이뤘다고 주장한다. 당 창건일을 대규모로 기념하는 것도 이러한 역사 서사의 연장선이다. 북한이 국가의 날(9월 9일)이 아닌 지도자의 날(10월 10일)을 더욱 성대하게 치르는 것은 수령의 권력 기반인 당 체제를 재확인하려는 정치적 의도 때문이다.
열병식은 대외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북한은 2020년 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에서 처음으로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공개한 후 이번에도 예외 없이 ‘화성포-20형’을 최강의 핵 전략 무기 체계로 선전했다. 그러나 이 미사일은 시험 발사조차 이뤄지지 않았고 지난해 ‘화성-19형’을 쏘아올리며 최종 완결판이라고 자찬했던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이다. 두 미사일의 길이는 28m로 유사하고 이동식 발사차량(TEL)도 11축 22개 바퀴로 동일하다. 차이는 탄소섬유 복합제를 사용한 엔진을 채택해 추력이 약 40%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핵심은 이미 화성-19형으로도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북한이 왜 또 다른 신형을 공개했느냐에 있다. 이는 김정은이 9월 21일 밝힌 “미국이 비핵화 집념을 버린다면 ‘좋은 추억을 가진’ 도널드 트럼프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발언의 연장선이다. 핵 군축 협상을 통해 제재 해제를 얻어내려는 의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지속적으로 과시하겠다는 신호다. 열병식 연설에서 직접적인 대미 비난은 없었지만 실체적 무기를 통해 미국을 압박한 셈이다.
중국·러시아·베트남·라오스 등의 고위 인사를 초청한 점도 눈길을 끈다. 이는 9월 중국 전승절 행사에서 시진핑을 중심으로 김정은과 블라디미르 푸틴이 나란히 선 북중러 연대를 평양 무대에서 재연하려는 의도다. 특히 또 럼 베트남 서기장의 방북은 중국과 경쟁하면서도 미국과 협력하는 베트남식 균형 외교를 참고해 김정은이 ‘주체 외교’의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로 읽힌다.
올해 열병식을 톺아보는 마음은 결코 편치 않다. 15만 명을 동원한 전야제 연설에서 김정은은 “지금과 같은 기세로 몇 해 동안 잘 투쟁하면 생활을 눈에 띄게 개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북한의 경제 상황이 악화돼 있음을 스스로 인정한 발언이다. 그런데도 막대한 자원을 군사력 확충과 열병식 과시에 쏟아붓는 것은 인민의 생활보다 지도자의 권력 기반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열병식은 체제의 위력을 과시한 군사 축제라기보다 경제난 속에서도 수령의 권위를 부각시키는 권력 보존의 의식이며, 김정은 체제의 불안한 자신감을 드러낸 정치적 제의(祭儀)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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