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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칼럼] 무너진 견제와 균형의 원칙

파리드 자카리아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냉전이후 세계 최정상 지켜온 美

자만감 빠져 민주주의 훼손시켜

트럼프 행정명령 남발 등 자초해





H-1B 비자 발급에 10만 달러의 수수료를 부과한다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새로운 규정이 화제를 불러왔다. 그러나 늘 그렇듯 대통령이 일정한 사전 공지 기간과 의견 수렴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국가 안보를 이유로 멋대로 법규를 바꾼다는 지적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이런 행동 양식은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계속 이어져왔다. 그가 취임 직후 취한 조치들 가운데 하나는 12명 이상의 감찰관들을 무더기로 파면한 것이었다. 이들을 해임하려면 개개인에 대한 구체적인 파면 이유를 명시하고 30일 전에 사전 통고를 해야 한다는 관련 규정은 완전히 무시됐다.

트럼프 정부는 행정부의 권한에 대한 견제를 약화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법과 규정을 무시하는 듯 보인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국제개발처(USAID)의 폐쇄를 의회에 요청할 수도 있었다. 해외 원조는 워낙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의회의 손을 빌렸다면 여론의 후폭풍을 염려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일방적인 행정조치를 택했다. 대부분의 관측통들은 이를 권위 찬탈과 권력 축적으로 간주한다. 이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별일 아닌 듯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필자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자랑스럽던 미국의 견제와 균형 시스템이 대체 어쩌다 이렇게 허약해졌느냐다. 오늘날 서방 민주국가들을 살펴보면 미국은 단연 돋보인다. 포퓰리즘의 광범위한 부상과 기득권에 대한 다양한 불만, 그리고 분노로 가득 찬 정치적 수사 속에서 미국은 입헌주의와 법치가 꾸준히 훼손되는 비자유적 민주주의의 길을 따라 다른 나라보다 더 멀리 이동한 듯 보인다. 세계 민주주의 현황을 측정하는 스웨덴의 V뎀인스티튜트는 미국 민주주의가 ‘유례없는’ 규모로 침식당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전 시대라면 현 행정부가 취한 조치들은 예외 없이 대중의 아우성을 초래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언론사에 대한 규제 위협과 소송, 법률 회사에 대한 정부 업무 또는 연방 건물 접근 거부 위협, 법무부를 이용해 정치적 반대 세력을 표적으로 삼는 행위, 그리고 미국 내 군사력 사용 등 비상한 조치를 일상적으로 목격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들을 행정권의 필수적인 행사라고 두둔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의 범위와 횟수가 전례 없는 수준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문제의 일부는 여러 면에서 지속적인 성공을 거둔 헌법의 오랜 역사에서 비롯된다. 미국의 정치적 틀은 단지 1776년이나 1789년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 초기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이 구축한 정부 구조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 시스템은 당시에는 현대적이었지만 그건 벌써 300년 전의 일이다. 워터게이트 이후 행정부 개입 금지를 중심으로 특정 규범들을 발전시켰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은 채 그들을 깨뜨리고 있는 데서 보듯 규범은 그저 규범일 뿐이다.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은 초당파적인 방식으로 판사와 판사의 임기를 정한다. 반면 미국은 당파색이 짙은 방식으로 종신직인 연방판사를 지명한다. 다른 국가들은 대법원에 법률 검토권의 궁극적 권한을 부여하는 것과 같은 견제와 균형의 기본 원칙을 미국으로부터 배웠으나 법률 제정 과정에서 이를 더욱 섬세하게 조율했다. 민주주의 붕괴 연구의 거목이자 ‘민주주의는 어떻게 사망하는가’의 공저자인 스티븐 레비츠키는 필자에게 입헌 민주주의가 부패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오랜 시간 성공을 누려온 미국이 변화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해서라고 말했다.

인간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를 통해 배운다는 말은 사업과 인생 모두에 적용된다. 미국은 냉전에서 승리했고 정보 혁명을 선도했으며 여러 측면에서 세계 정상에 굳건히 위치해 있기 때문에 시스템을 조사하고 결함을 검토해 이를 개선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레비츠키는 “미국의 예외주의가 우리의 눈을 가려 헌법과 정치적 시스템의 약점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기 성찰의 부재와 함께 리더십의 실패를 미국의 민주주의를 허약하게 만든 결정적 요인으로 꼽았다.

레비츠키는 “폴란드와 브라질 같은 곳에서는 수 세대에 걸친 경험을 통해 법치와 헌법적 안전장치를 잃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공화당 지도자들, 기업체 수장들과 연방대법관들은 우리가 실제로 민주주의의 쇠퇴, 심지어 민주주의의 사망까지 지켜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 보인다. 우리는 다르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상상의 부재가 치명적인 자만심을 만들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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