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의 선택만이 유일한 길로 여겨졌던 차세대 고대역폭 메모리(HBM) HBM4(6세대) 시장 전망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오픈AI가 700조 원 규모의 스타게이트 프로젝트 파트너로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를 낙점하면서다. 엔비디아를 중심으로 형성됐던 단일 전선이 무너지고 거대한 신규 수요처라는 제2 전선이 열리면서 HBM 제조사들의 셈법도 완전히 달라졌다.
700조 원 ‘스타게이트’, HBM 시장 판도 뒤흔들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HBM4 수요 방정식을 새로 쓰게 한 핵심 변수는 단연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다. 2029년 완성을 목표로 추진되는 이 프로젝트는 현존하는 데이터센터의 100배 규모에 달하는 전력을 소모하는 거대 사업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필요한 HBM 물량은 웨이퍼 기준 월 90만 장으로, 현재 전 세계 HBM 생산 가능량인 40만 장의 두 배를 뛰어넘는 수준이다. 이 물량을 감당할 수 있는 공급사는 사실상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뿐이다. 이달 1일 샘 올트먼 오픈AI CEO가 직접 한국을 찾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연달아 구매의향서(LOI)를 체결한 것은 이러한 현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SK하이닉스, ‘신뢰’ 기반으로 왕좌 넘어 제국으로
SK하이닉스는 안정적 수율과 생산 경험 등 시장 신뢰를 기반으로 왕좌를 더욱 굳건히 다질 발판을 마련했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의 H100, H200 등 현존 최고 성능의 AI 가속기에 HBM3와 HBM3E를 사실상 독점 공급하며 품질과 양산 능력을 입증했다. 그 중심에는 반도체 칩 사이를 액체 보호재로 채워 열 방출과 내구성을 극대화하는 독자 기술 ‘어드밴스드 MR-MUF’가 있다. 스타게이트와 같은 거대 인프라는 단 하나의 부품 불량이 전체 시스템의 안정성을 위협할 수 있기에 SK하이닉스가 쌓아온 신뢰의 가치는 절대적이다. 엔비디아의 핵심 파트너에서 나아가 AI 생태계 전체를 떠받치는 메모리 공급자로 위상을 격상시킨 것이다.
삼성전자, 그룹 역량 총동원…‘엔비디아 굴레’ 벗는다
삼성전자는 기술 초격차를 무기로 엔비디아 의존도를 탈피하고 단숨에 HBM4 시장의 주력군으로 떠올랐다. 삼성전자는 업계에서 가장 앞선 10나노급 6세대(1c) D램을 코어 다이에, 4나노 파운드리 공정을 베이스 다이에 동시 적용해 경쟁사보다 한 세대 앞선 기술로 속도와 전력 효율을 극대화한다는 전략이다. 오픈AI와 협력은 삼성에 날개를 달아줬다. HBM 공급은 물론, 삼성물산의 데이터센터 건설, 삼성중공업의 수상 데이터센터 개발까지 그룹 차원의 ‘올인원 솔루션’을 제공하는 포괄적 파트너십이다. 올트먼 CEO와 함께 방한한 오픈AI 핵심 연구진이 삼성전자 평택캠퍼스를 찾아 생산라인을 직접 둘러본 것은 양사 협력의 깊이를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마이크론, 복잡해진 셈법에 생존전략 ‘기로’
반면 미국의 마이크론은 생존을 위한 새로운 전략을 고심하게 됐다. ‘원가 경쟁력’을 앞세워 엔비디아 공급망의 한 축을 노리던 전략에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삼성과 SK가 스타게이트라는 거대하고 안정적인 수요처를 확보하면서 가격 협상 등에서 우위를 점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양강이 다른 한 축에서 세를 불리는 동안, 마이크론은 엔비디아를 포함한 다른 고객사를 상대로 더욱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엔비디아가 공급망 다변화를 위해 마이크론의 손을 잡더라도, 시장의 무게중심이 이동한 상황에서 과거와 같은 파급력을 기대하기는 어려워졌다.
HBM4 전쟁의 향방은 이제 안갯속이다. 엔비디아의 2026년 신제품 루빈 GPU의 퀄 테스트 통과라는 단일 목표를 넘어섰다. AI 시대를 여는 거대 자본과 손잡고 새로운 생태계를 누가 먼저 구축하느냐의 싸움으로 진화했다. ‘K-반도체 연합’은 오픈AI와의 동맹을 통해 이 새로운 게임에서 가장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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