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직접 나서 금융사가 투자 상품 보상을 하도록 선례를 남긴 것은 대우 채권 환매 때였다. 1999년 7월 대우그룹이 공중분해되면서 주가는 폭락했고 대우채 편입 펀드에서 자금을 빼는 ‘펀드런’이 발생했다. 급기야 투자신탁사들은 환매 중단을 선언했고, 정부가 환매 시기에 따라 원금을 보장해주기로 하자 겨우 사태가 진정됐다. 시장 불안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지만 투자자 손실에 대해 정부가 일괄 책임지는 시발점이 됐다. 2011년 부산저축은행 후순위채 불완전판매 때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는 투자자별로 20~55% 손해배상을 결정했다. 피해자들이 자필 서명을 했고 이자율이 높으면 당연히 위험성도 높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고 인정됨에도 일부 배상 결정이 내려졌다.
수천억 원 규모의 투자 손실이 발생한 2019년 해외금리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를 계기로 금융소비자보호법이 시행(2021년)된 후 ‘금융투자자’보다는 ‘금융소비자’라는 단어가 더 익숙해졌다. DLF 상품은 독일 국채 등을 기초자산으로 설계해 해외금리가 일정 수준 이상이면 고정된 이자를 지급하고, 금리가 떨어지면 원금 손실이 발생하는 구조였다. 당시 “독일 국채금리가 -0.2% 아래로 떨어진 적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다”고 일부 판매사는 장담했지만 저금리로 인해 원금을 몽땅 날리는 사례까지 나왔다. 이처럼 고위험 상품에 대해 “절대 원금 손실이 없다” 또는 “안전한 상품이다”라는 식으로 투자 권유를 했다면 판매사가 책임을 지는 게 합당하다. 피해액이 1조 9000억 원에 달하는 라임·옵티머스 사태 역시 금융 사기였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취임 이후 은행·보험·증권 등 업권 최고경영자(CEO)를 만나는 자리마다 금융소비자 보호를 핵심 과제로 강조하고 있다. 금감원이 ‘금융소비자보호 거버넌스 모범관행’까지 만들자 금융사들은 내부통제위원회를 운영하기 위한 소비자보호 담당 임원(CCO)을 선임하는 등 앞다퉈 조직 정비에 나섰다. 금융 상품 설계부터 판매, 사후 관리까지 전 과정에서 소비자 권익을 먼저 고려해달라는 취지 만큼은 백번 공감한다. 그런데 핵심성과지표(KPI) 설계 시 단기 영업 실적보다 소비자보호 관련 지표를 우선 반영하도록 하는 부분은 인센티브와 직결되는 것이어서 현장에서 우려가 나온다. 영업과 판매 조직의 KPI를 결정하고 평가함에 있어 배타적인 거부권까지 행사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투자 손실은 불완전판매 때문이고, 일괄 배상해야 한다’는 일종의 학습 효과가 고착화된 부분이다. 자신이 책임을 지고 투자한 뒤 자금을 회수하는 투자자와 소비자는 엄밀히 구분돼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투자자 모두를 소비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금융 당국은 홍콩 H지수 기초 주가연계증권(ELS) 사태가 발생하자 일부 불완전판매를 이유로 금융사를 압박해 모든 투자자의 손실을 배상해주도록 했다. 이후 홈플러스 자산유동화 전자단기사채(ABSTB), 한국투자벨기에코어오피스2호 펀드 등에서 단체로 손실이 발생할 때마다 투자자들이 불완전판매를 주장하며 금감원이나 판매사 앞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쉽게 보게 됐다. 그중 일부는 “친한 지점장이 가보라고 했다”며 무작정 나타나기도 했다.
여전히 투자 상품과 원금 보장 상품을 오인하는 투자자가 많다. 약자라는 선입견을 주는 금융소비자라는 용어로 인해 투자자 스스로 책임감을 놓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금융소비자보호처 홈페이지가 인베스터(Investor)가 아닌 컨슈머(Consumer)로 표기된 것에 대해 글로벌 투자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당국은 정작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비트코인 등에 대해서는 금융 상품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투자자도 소비자도 아닌 ‘이용자(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로 정의하고 있지 않는가.
금감원에서 영업행위 규제 기능을 떼내 금융소비자보호원이라는 전담 기관을 새로 만드는 것만으로 금융소비자보호가 강화된다고 보진 않는다. 이참에 금융투자자와 소비자·이용자에 대한 용어를 정리해 투자자 인식도 함께 바꿔나갔으면 한다. 손실을 본 투자자가 다수라고 불완전판매로 몰아가 무조건 배상하라고 한다면 주주에 대한 배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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