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지 100일이 지났다. 새 정부가 마주하고 있는 경제 상황은 회색빛으로 가득하다. 한미 관세 협상 같은 어려운 대외 과제도 있고 철강·석유화학 등 주력 산업의 부진도 풀어가야 할 문제다. 앞으로 우리 경제가 성장하기 위한 새로운 산업에 대한 비전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대내외 환경에서 정부가 제시한 ‘실용주의’라는 화두는 무척 반가운 것이었다. 실용주의는 ‘도그마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는 측면에서 침체된 경제의 활력을 복원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탄소 규제의 방향을 보면 실용주의가 벌써 빛을 잃은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필자는 일관되게 탄소 규제는 산업 경쟁력과 조화롭게 시행돼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탄소 규제는 예측 가능성이 높아야 하고 산업 경쟁력을 고려해 안정적으로 시행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기업이 규제를 준수하면서 안정적으로 수익을 창출하고 미래 자본을 축적해 새로운 투자를 할 수 있는 선순환 체계가 구축될 수 있다. 하지만 2035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나 제4차 계획 기간 배출권거래제의 방향은 규제의 안정성을 흔들어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2035 NDC’는 2035년까지 우리나라 온실가스 감축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이정표다. 한번 NDC가 결정되면 향후 기후 및 에너지 정책이 모두 NDC가 제시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향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력 수급 기본 계획과 장기 천연가스 수급 계획과 같은 핵심 에너지 정책들이 NDC를 기준으로 수립되고, 이에 따라 발전설비가 도입되거나 국제시장에서 천연가스를 도입하게 된다. 하지만 정부가 최근 제안한 네 가지 감축안에 대해 전문가들의 제대로 된 검토가 이뤄졌는지 의문이다. 온실가스 감축 수단과 비용 등을 상세히 살폈는지 알 수 없고, 그래서 실용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인다.
온실가스 감축 정책의 핵심인 배출권거래제도 마찬가지다. 최근 공청회를 통해 나타난 제4차 계획 기간 배출권거래제 할당 계획의 골자는 2030년 NDC 달성을 위해 감축 노력을 전반적으로 강화했다. 그러나 4기 할당 정책이 3기까지와 비교해 크게 바뀌어 예측 가능성 측면에서 우려를 낳고 있다. 예를 들어 제4차 계획 기간에 배출 허용 총량에 포함된 시장 안정화 예비분은 3기 할당에 비해 8배 급증했다. 예비분을 대폭 늘린 근거를 정확히 알 수 없어 준칙에 의한 설정과는 거리가 멀다. 또 2030년을 목표로 선형 감축 경로를 설정한 것도 이전과는 달라진 것이다. 대다수 배출권 할당 대상 업체는 4기에도 3기와 유사한 경로를 따를 것으로 예상했는데 정책의 예측 가능성이 무너진 셈이다.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합리적 감축 목표 설정과 적절한 탄소 규제의 수립은 필요하다. 다만 탄소 규제가 규제 대상의 예측 가능성과 멀어지면, 즉 실용성과 멀어질수록 규제 대상인 기업에 명확하고 적절한 신호를 제공하기보다는 부담으로만 남게 된다. 실용의 사전적 정의는 ‘실제로 쓰거나 쓰임’이다. 이를 탄소 규제에 접목해 본다면 경제주체가 실제 사용할 수 있는 감축 수단으로 온실가스를 줄이게 만드는 것이 실용적 규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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