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골프용품 시장의 가장 큰 화두는 단연 제로 토크 퍼터다. 지난해부터 시장은 급격히 냉각됐지만 제로 토크 퍼터 시장은 뜨겁다. 랩(L.A.B.)골프가 불씨를 지핀 후 PXG, 캘러웨이, 테일러메이드, 티피밀스 등도 합류하면서 제로 토크 열풍이 불었다. 해당 업체들은 “골프 시장이 크게 위축됐지만 그나마 제로 토크 퍼터 덕에 선방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흐름에 편승하지 않은 업체도 있다. 대표적인 곳이 타이틀리스트와 핑골프다. 퍼터 시장에서 큰 지분이 있는 두 업체는 여전히 제로 토크 퍼터를 내놓지 않고 있다. 두 곳 모두 “본사에서는 앞으로도 제로 토크 퍼터를 내놓을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한다.
제로 토크 퍼터의 열풍은 계속될까, 아니면 일시적인 유행에 그칠까.
1 제로 토크는 새로운 기술인가
아니다. 이를 알기 위해선 우선 토크(torque) 개념부터 알아야 한다. 퍼터에서 토크란 스크로크를 할 때 헤드가 축을 중심으로 좌우로 회전하려는 힘을 말한다. 제로 토크는 회전하려는 힘을 제로(0)에 가깝게 만들었다는 것으로, 흔히 스트로크 때 헤드의 비틀림이 없다고 표현한다. 드라이버의 관성모멘트(MOI)와 비교할 수 있다.
퍼터에서 토크를 줄여야겠다는 아이디어는 사실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다만 회사마다 부르는 명칭이 달랐다. 예를 들어 캘러웨이는 2016년 토 업 퍼터 라인을 출시했는데 이 퍼터는 다른 제품들과 헤드 밸런스가 조금 달랐다. 일반적인 퍼터의 밸런스를 살펴보면, 샤프트 중간 부분을 손가락 위에 올렸을 때 토가 지면을 향하거나(주로 앤서형 퍼터) 페이스가 지면과 수평인 상태(주로 말렛 퍼터)를 이루는데 토 업 퍼터는 토가 하늘을 향한다.
캘러웨이는 토 업 퍼터에 적용된 기술을 두고 ‘스트로크 밸런스드 테크놀로지’(사실 일반 골퍼가 이 용어를 들으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힘들다)라는 이름을 붙였다. 현재 대부분의 제로 토크 퍼터도 토 업 밸런스를 가지고 있다. 토 업에 적용된 기술과 비슷한 개념에 대해 다른 회사들은 CG(무게중심) 밸런스, 타깃 라인 밸런스 등으로 불렀다.
모든 제로 토크 퍼터가 토 업 밸런스를 가진 건 아니다. 티피밀스 측은 “우리 퍼터는 무게중심을 정확하게 맞췄기 때문에 밸런스가 한 쪽으로 치우지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티피밀스의 제로 토크 퍼터를 양 손가락 위에 올려놓고 확인해 보면 헤드 무게가 어느 한 방향으로 쏠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제로 토크 퍼터 샤프트는 대부분 헤드 무게중심 지점에 꽂혀 있다. 하지만 PXG는 힐에 샤프트를 꽂는다. 대신 네크의 형태를 변형해 샤프트 축이 무게중심을 향하도록 했다. 이런 디자인은 캘러웨이의 토 업 라인 퍼터도 마찬가지인데, 이 디자인의 원조는 핑 퍼터로 알려져 있다.
2 제로 토크 퍼터는 어떻게 유행했나
세 가지 요인이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냈다고 할 수 있다. 선수, 시연 장비와 소셜미디어, 그리고 적절한 용어 선택이다.
먼저 선수다. 애덤 스콧(호주)은 2022년부터 랩골프의 메즈1 퍼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퍼팅 입스에 시달리던 루카스 글로버(미국) 역시 랩골프 퍼터를 들고 나와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시즌 막판에 2연승을 달성하며 주목을 받았다. 이후 윌 잴러토리스, 필 미컬슨, 브라이언 하먼(이상 미국) 등도 제로 토크 퍼터를 백에 넣었다. 올해 JJ 스펀(미국)은 US 오픈에서 우승하면서 제로 토크 퍼터로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했다. 한국 선수 중에서는 안병훈, 김효주, 김아림, 방신실 등이 이 대열에 합류했다.
둘째는 시연 장비와 소셜미디어다. 랩골프는 제로 토크 퍼터와 함께 리빌러(The Revealer)를 개발했다. 굳이 번역하자면 ‘폭로자’ 또는 ‘드러내는 사람’쯤으로 옮길 수 있는 리빌러는 제로 토크 퍼터와 일반 퍼터의 차이점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도구다. 직사각 형태의 리빌러에는 퍼터를 매달 수 있는 고리와 샤프트를 끼울 수 있는 홈이 있다. 리빌러에 퍼터를 매단 채 스트로크를 했을 때 제로 토크 퍼터 페이스는 타깃과 직각인 상태에서 움직이지 않지만, 일반 퍼터는 좌우로 크게 흔들린다.
리빌러는 매우 단순한 도구지만 일반 골퍼들에게 토크 개념이나 작동 원리 등에 관한 공학적 설명 없이 단 한 번의 시연으로 제로 토크와 일반 퍼터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최고의 퍼포먼스 도구로 쓰였다.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에는 ‘제로 토크란 무엇인가’ ‘제로 토크 테스트’ ‘제로 토크 퍼터와 일반 퍼터의 차이점’ 등의 제목을 단 영상이 쏟아졌다.
마지막 세 번째는 단순한 용어 선택이다. 사실 제로 토크라는 단어 선택은 ‘신의 한 수’였다. 일상에서 익숙한 제로 슈거처럼 제로 토크는 매우 직관적이다. 이전의 추상적인 기술 용어와 달리 머리에 쏙쏙 박히고 입에 착 감긴다. 이 세 가지 결합이 제로 토크의 유행을 이끌었다.
3 왜 핑과 타이틀리스트는 합류하지 않나
핑은 현대 퍼터 이론의 근간을 확립한 브랜드다. 타이틀리스트 스코티카메론은 현 시점에서 가장 시장 지배적인 퍼터 브랜드다. 그런데 이들 ‘빅2’는 제로 토크 열풍에서 한발 물러서 있다.
올해 5월 한국을 방문한 존 K 솔하임 핑골프 최고경영자(CEO)는 당시 우리와의 인터뷰에서 “제로 토크 퍼터도 하나의 유행이다. 우리는 하반기에 ‘온셋’ 퍼터를 내놓을 예정이다. 우리는 이게 더 나은 솔루션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구조적으로도 더 낫다”고 귀띔했다.
타이틀리스트도 투어 선수들에게 커스텀 메이드로 제공하는 스코티카메론 팬텀 라인 일부에 제로 토크 퍼터와 비슷한 개념의 퍼터를 제공하고 있긴 하지만 제로 토크라는 용어 대신 OC(Onset Center; 온셋 센터)라 부른다.
핑과 타이틀리스트가 공통으로 말하는 ‘온셋’은 뭘까. 이는 오프셋과 반대 개념이다. 오프셋은 헤드 페이스가 샤프트보다 뒤쪽에 위치한 디자인을 의미한다. 아이언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인데, 초보자들의 경우 손보다 클럽 헤드가 뒤늦게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페이스를 샤프트보다 약간 뒤에 둬 임팩트가 보다 직각 상태에서 이뤄질 확률을 높이는 것이다. 대부분의 퍼터도 네크 부분을 꺾어 샤프트가 페이스보다 앞쪽에 위치하는 디자인을 택하고 있다.
온셋은 이와 달리 페이스가 샤프트보다 앞쪽으로 나온 디자인이다. 온셋 대신 네거티브(마이너스) 오프셋이라고도 부른다. 대부분의 제로 토크 퍼터도 온셋 디자인을 선택하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제로 토크 퍼터의 밸런스는 주로 토 업인데 비해 온셋 퍼터는 페이스가 지면과 수평인 페이스 밸런스이면서 살짝 토가 아래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우원희 핑골프 테크팀장은 “온셋 퍼터의 가장 큰 장점은 시인성이다. 샤프트가 시야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정렬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이어 “오프셋 퍼터에 비해 좀 더 빨리 임팩트가 이뤄지기 때문에 감각적인 골퍼들이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덧붙였다.
4 제로 토크는 모든 골퍼에게 알맞나
아니다. 제로 토크 퍼터의 가장 큰 장점은 5m 이내 거리에서 보여주는 탁월한 직진성이지만 롱 퍼트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바로 ‘거리감’이다.
“퍼팅도 작은 스윙이다”라는 말이 있다. 스트로크를 할 때 작은 원호를 그린다는 뜻이다. 공현진 타이틀리스트 퍼터 매니저는 “쇼트 퍼트를 할 때는 후방 스트로트 길이가 짧기 때문에 거의 직선으로만 움직일 수 있지만 장거리 퍼트를 할 때는 백스윙이 길어지면서 원호를 그릴 수밖에 없다”며 “이때 페이스는 스트로크 과정 중 자연스럽게 열렸다가 닫히게 된다. 그런데 그런 움직임이 억제된다면 오히려 정확한 임팩트에 방해가 된다”고 했다.
백영길 티피밀스 코리아 대표는 “제로 토크 퍼터의 이런 단점을 고려해 롱 퍼트를 할 때 스트로크 크기를 줄이고 힘으로 때린다면 자칫 거리감에 혼란이 생기면서 거리 조절이 뒤죽박죽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미컬슨도 지난해에는 제로 토크 퍼터를 사용하다 올해부터 예전의 캘러웨이 오디세이 블레이드 L자 퍼터를 백에 다시 넣었다. 잠시 외도를 하다 조강지처에게 돌아간 셈이다.
5 제로 토크 퍼터의 미래는?
앤서는 핑이 내놓은 모델 중 하나였지만 이제는 하나의 장르가 됐다. 블레이드 헤드에 페이스 뒤쪽을 파내고 힐과 토에 무게를 배분한 퍼터를 모든 브랜드들이 앤서 퍼터라고 부른다. 그런가 하면 밀링 퍼터는 스코티카메론이 처음 내놓은 이후 거의 모든 브랜드가 고급 라인에 같은 방식의 퍼터를 내놓고 있다. 캘러웨이 오디세이의 투볼 퍼터도 수많은 아류작을 이끌었다.
제로 토크 퍼터는 이제 일시적인 유행의 단계는 넘어선 듯하다. 이에 힘입어 랩골프는 설립 7년 만에 두둑한 금전적인 보상도 얻었다. 명품 대기업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의 지원을 받는 사모펀드 L캐터턴이 약 2억 달러(약 2800억 원)를 투자해 랩골프의 지분 대부분을 인수한 것이다.
그렇다고 랩골프의 미래가 보장되는 건 아니다. 퍼터는 가장 민감하고 개인적인 선호도가 천차만별인 클럽이다. 어떤 프로들은 20년 동안 창고에 처박아놨던 퍼터를 어느 날 다시 들고 나오기도 한다. 퍼터는 기능 이상으로 외관도 중요하다. 외관은 심리에도 영향을 미친다. 어드레스를 했을 때 “각이 나와야 한다”고 하는데, 그 ‘각’에 대한 의미는 골퍼마다 다르다. 퍼터는 그만큼 종류도 많고 개인별 선호도도 크게 좌우하는 클럽이다.
한 퍼터 브랜드 관계자는 “많이 팔린다는 건 그만큼 특장점이 있다는 것인데, 최근에는 중고 시장에 제로 토크 퍼터가 하나씩 올라오고 있기도 하다. 제로 토크 퍼터가 유행한다고 해서 구매를 했지만 본인과 맞지 않아 내놓는 것으로 해석된다”며 “제로 토크 열풍도 서서히 식을 것이다. 문제는 그 속도와 폭이다. 현재는 확고한 하나의 장르가 될지의 변곡점에 서 있는 듯하다”고 관측했다.
이다연 랩골프 코리아 마케팅팀 과장은 “우리의 제로 토크 퍼터 기술은 이미 시장에서 입증 받았다”며 “웨이트를 이용한 밸런스 기술을 통해 골퍼 개개인에게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는 건 랩골프만의 장점이자 경쟁력이다. 퍼터 전문 브랜드로서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졌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 제로 토크와 일반 퍼터의 간단한 구별법
리빌러라는 기구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제로 토크와 일반 퍼터를 간단하게 구별할 수 있다. 먼저 티 2개를 준비한다. 어드레스 자세를 취하고 티 하나는 그립 끝 구멍에 끼운 다음 이를 왼손으로 잡는다. 이어 오른손으로 나머지 티를 잡고 샤프트 중간 부분 아래에 가로질러 댄다. 이 상태에서 오른손으로 잡은 티를 이용해 샤프트를 들어 올린다. 제로 토크 퍼터는 헤드 방향이 바뀌지 않으면서 부드럽게 올라오지만 일반 퍼터는 헤드가 돌아가는 걸 느낄 수 있다.
정확하진 않더라도 보다 손쉽게 파악하는 방법도 있다. 양 손바닥으로 샤프트 중간 부분을 잡고 비비면서 퍼터를 돌려주는 것이다. 제로 토크 퍼터는 그립 부분이 요동 없이 부드럽게 돌아가지만 일반 퍼터의 그립 부분은 심하게 흔들리면서 회전한다. 흔들리는 정도로 보자면 토 행이 가장 크고, 페이스 밸런스는 중간, 제로 토크는 가장 부드럽게 회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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