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교착상태에 몰린 미국과의 협상을 돌파할 카드로 한미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꺼내 들었다. 미국에 3500억 달러(약 485조 원)를 투자하는 과정에서 원·달러 환율이 급등(원화 가치 하락)할 수 있으므로 여기에 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해달라는 취지다. 하지만 통화스와프를 체결하는 주체는 미국 재무부가 아니라 독립기관인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라는 점, 현재 한국의 상황이 연준의 통화스와프 체결 요건에 부합하지 않는 점 등을 감안하면 실제 성사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게 시장의 관측이다. 이번 문제를 책임져야 하는 한국은행 내부에서는 곤혹스럽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당장 스와프 현실화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목소리가 들린다. 실제 미 연준은 유로존·영국·일본·스위스·캐나다 등 5개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에는 경제위기 등 비상시에 한정해 전체 한도를 정해놓는 방식으로 그때그때 통화스와프 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스와프 계약이 자칫 혈세 낭비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조치다.
이에 따라 미국은 통화스와프를 발동할 수 있는 3가지 요건을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극심한 미 달러화 유동성 부족이 나타나 △신흥국이 금융 충격을 받고 △이 격이 미국 경제에 역파급(spill-back)을 미치는 경우다. 우리나라가 제안한 무제한 통화스와프가 상설인지, 한시적인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현재 둘 다 실현될 확률은 크지 않다. 상설 통화스와프는 대부분 기축통화국과 체결한 상태고 우리나라가 한시적 통화스와프를 맺기에 기준을 충족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8월 말 기준 4136억 달러로 역대 최고치인 2021년 10월(4692억 달러) 대비 줄었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환율 변동성은 제한적이었다. 이는 순대외금융자산 등 대외 안전판을 기반으로 시장이 관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나라가 역대 미국과 통화스와프를 체결한 것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단 두 차례뿐이었다. 전대미문의 외부 충격이 발생했을 때 체결한 것으로 산업·투자와 관련한 무제한 통화스와프 체결은 가능성이 희박하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설사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통화스와프를 허용한다고 해도 계약 주체인 미 연준이 이를 수용할지도 의문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금리 인하, 연준의 독립성 보장 등을 두고 사사건건 대립해왔다.
윤재호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역대 정부가 매번 한미 스와프 상설화를 추진했지만 번번이 좌절됐다”며 “이번에도 현실적인 제약과 미국 측 입장을 고려할 때 성사될 확률은 크지 않다”고 평가했다.
한은 내부는 당혹스러운 분위기다. 정부가 현금 출자를 요구하는 미국에 맞불 성격으로 무제한 통화스와프라는 ‘강 대 강’ 협상 카드를 꺼냈지만 정작 계약 당사자인 한은이 실제로 협상에 돌입해 타결에 실패할 경우 비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한은이 연준의 스와프 조건을 잘 알고 있는데 체결 확률이 크지 않은 협상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곤란한 입장에 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실현 가능성이 낮은데도 정부가 미국에 무제한 통화스와프 카드를 제안한 것은 그만큼 미 달러화가 우리 경제에 끼치는 영향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한은이 이날 공개한 ‘달러 패권과 미국발 충격의 글로벌 파급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달러의 국제통화 지위가 없어지거나 수출 대금을 원화로 결제할 경우 미국발 금융 충격이 국내 생산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도 30% 축소된다고 발표했다.
한편 15일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후속 관세 협상을 위해 미국 워싱턴DC로 출국했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이 미국 뉴욕에서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을 면담하고 귀국한 뒤 하루 만에 이뤄진 고위급 릴레이 방미다. 여 본부장은 워싱턴DC에서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 등 미 통상 당국 관계자들을 만날 예정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