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전직 경제 고위관료들이 기획재정부 분리 방안에 대해 ‘예산의 정치화'가 일어날 수 있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놨다. 대통령실로 예산 편성 권한이 집중되면서 견제와 균형의 논리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정적인 재원을 정무적인 감각을 통해 균형 있게 배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조직 개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목소리도 함께 나왔다.
서울경제신문이 8일 실시한 기재부 분리 관련 긴급진단에서 대다수 전직 관료들은 “대통령실의 예산 입김이 더 강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과거 기획예산처를 뒀던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도 예산처가 총리실 산하로 들어가 정치 논리에 더 크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이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예산이 정치적으로 편성이 되는 것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독립된 관청에서 세입과 세출을 함께 하는 것이 효율적이다”면서 “정치적 외압에 휘둘리지 않도록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적 예산 편성이 자칫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로 이어져 재정 건전성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지적도 함께 나왔다.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과거에도 예산과 세입을 분리했던 전례가 있지만 비효율성과 재정 운영의 컨트롤타워 약화 문제로 금방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현 정부의 확장 재정 기조로 향후 5년간 재정지출은 연평균 5.5%씩 증가할 전망이다. 이에 따라 국가채무는 올해 1301조 9000억 원에서 매년 100조원 이상 증가해 2029년 말에는 1788조 9000억 원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 경우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올해 49.1%에서 2029년에 58.0%로 크게 상승한다. 특히 저출산·고령화와 저성장 추세가 고착화될 경우 40년 뒤인 우리나라의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150%를 넘어선다는 3차 장기재정전망도 나왔다. 잠재성장률은 반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재정 지출은 계속 늘면서 재정건전성이 악화될 거란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기재부 기능 분리로 인해 균형 잡힌 예산 분배가 가능할 것이란 긍정적 평가도 나왔다. 김용진 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기재부 2차관)은 “예산 기능이 분리되면 국정 전반에 걸쳐 경제·사회·행정·외교·안보까지 균형 있는 자원 배분이 가능해진다”며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국무조정실 산하 예산처 체제가 운영되면서 큰 틀에서 사회복지 재정 확충 등의 성과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포용적 예산을 편성하는 데는 예산처 분리가 더 유리하다는 뜻이다.
당초 정부 조직 설계와 달리 예산처의 기능이 더 비대해질 수 있다는 경고의 목소리도 나왔다. 현재 기재부 체제에서는 세제실과 세입·세출을 논의하고 경제정책국과 성장률 전망치를 공유하면서 일정 범위 이내에서 예산을 편성했다면 앞으로는 오히려 방망이를 더 크게 휘두를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유일호 전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기재부의 힘을 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예산 부처의 힘이 더 커질 수 도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부처의 한 관계자는 “이번 조직개편은 엄밀히 말하면 기재부의 힘을 빼자는 게 아니라 기재부를 더 말을 잘 듣는 조직으로 바꾸자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미국을 제외하고 다른 주요7개국(G7) 선진국들이 예산과 정책 기능을 통합하고 있는 국제적 흐름을 고려해 조직 개편 이후의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김낙회 전 관세청장은 "경제부총리가 인공지능(AI) 혁신 등을 통해 잠재성장률 제고를 주도해야 하는데 예산 기능이 빠져나가면 재원 조달·정책 추진에 제약이 생길 수 있어 이런 우려가 생기지 않도록 부처 간 조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 전 장관도 “미국은 관리예산국(OMB)이 별도로 있지만 미 의회가 예산을 손쉽게 바꿀 수 있어 한국과 분명히 상황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재경부가 금융 정책 기능을 흡수하면서 감독 권한이 분리돼 국민들의 정책 안정성은 오히려 떨어질 수 있다는 경고도 제기됐다.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은 “금융정책은 시장과 호흡을 맞춰야 하는데 산업이 집중된 서울을 떠나는 것은 맞지 않다”면서 “금융의 글로벌 경쟁력이 강화되지 못하는 이유가 자꾸 조직을 분산시키는 데에 있다”고 말했다. 이어 "새 정부의 핵심 목표가 확장 재정과 생산적 금융인데 조직을 흔들면 오히려 비생산적 금융으로 갈 위험이 있다”고 우려했다.
예산권을 빼앗긴 재경부가 향후 경제정책을 펼치는데 있어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작지 않다. 지금도 다른 부처와 업무 협조가 어려운데 예산마저 없으면 정책 조정 업무가 사실상 마비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기재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금융이라는 지렛대가 새로 생긴만큼 업무를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