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석유화학 업종에 메스를 대겠다고 선언한 배경에는 기업들의 자율적 사업 재편을 기다리다 우리 경제 전반에 더 큰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자리 잡고 있다. 실제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은 과잉설비 감축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음에도 이해득실을 따지면서 설비 통폐합을 미루고 있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실제 석유화학 업계에 따르면 올해 업계 내에서 자발적으로 진행된 설비 구조조정 사례는 롯데케미칼과 HD현대오일뱅크가 충남 대산 산업단지에서 추진한 나프타분해설비(NCC) 통합이 사실상 유일하다. 이 외 설비들은 일부 공장의 조업을 중단하는 등 가동률이 상당히 떨어진 상태지만 이렇다 할 구조조정 방안을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여수 산단에 위치한 여천NCC의 경우 손해를 보며 공장을 돌리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소유주인 한화그룹과 DL그룹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수년째 수천억 원대의 적자를 기록한 여천NCC는 올해 말까지 최소 3000억 원의 유동자금이 부족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한화솔루션은 지난달 말 이사회에서 1500억 원 규모의 자금 대여를 승인했지만 DL케미칼 측은 경영 개선이 필요하다며 자금 지원을 거부했다. 부도 위기설까지 나오면서 DL그룹이 일단 한발 물러섰지만 대주주 간 갈등은 진행형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14일 “조선 산업과 달리 석유화학 산업은 주요 업체만 10곳에 달하고 협회 회원사는 33곳”이라며 “각자의 이익이 달라 업계 자율 방식으로는 빅딜이 성사되기 어려운 구조”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버티기로는 승산이 없다고 한목소리로 지적한다. 석유화학 산업 위기의 뿌리인 글로벌 공급과잉이 수년 내 해소될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2014년 1950만 톤이던 에틸렌 생산 설비 규모를 지난해 5274만 톤으로 키웠다. 10년 사이 중국에 증설된 설비만 해도 한국의 석유화학 생산능력(1270만 톤)의 2.6배에 달하는 셈이다. 여기에 새로운 먹거리 창출에 나선 중동 국가들마저 석유화학 설비 구축에 뛰어든 상황이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석유화학 설비는 한 번 만들면 30~40년은 일단 돌려야 한다”며 “신흥국의 넘쳐나는 설비를 감당할 만큼 수요가 크게 늘 것이라 기대하기도 어렵다”고 설명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국화학산업협회의 의뢰를 받아 한국 석유화학 산업 실태를 진단한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구조조정이 없으면 3년 내 국내 석유화학 업계의 절반이 도산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실제 한국전력공사에 따르면 전력 다소비 업종인 석유화학·철강 산업이 동시에 불황을 겪은 까닭에 2분기 산업용 전력 사용량은 전년 대비 1.1% 줄어든 6.9GWh를 기록했다. 산업용 전력 소비는 2022년 4분기부터 11개 분기 연속 감소세를 이어가고 있다. 여수시에 따르면 2021년 87%였던 여수국가산단의 공장 가동률은 지난해 78.5%로 떨어진 데 이어 올해는 60%대로 내려앉았다.
정부는 상당한 규모의 설비 통폐합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한국의 석유화학 설비는 울산·여수·대산 산단에 몰려 있는데 산단별로 NCC 공장 1~2개씩은 정리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울산에 2개, 여수와 대산에는 각 4개의 NCC 공장이 운영되고 있다. 사업 재편은 정유사를 중심으로 석유화학 설비를 수직 통합하는 방안이 유력한 것으로 전해진다. 석유화학 산업의 원료인 나프타를 직접 생산하는 정유사들이 주요 설비를 직접 관리하는 방식이 가장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8월 중 발표할 석유화학 산업 재편 방안에는 이 같은 통폐합을 유도할 세제·지원 정책이 포함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주요 석유화학 기업들의 강도 높은 자구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기초 유분을 생산하는 업스트림 라인에서 설비 감축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대주주를 비롯한 기업 스스로의 자구 노력도 전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제공하는 각종 세제·금융 지원을 받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는 의미다.
한편 기획재정부와 산업부는 이날 글로벌 과잉공급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품목관세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철강 업계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오승철 산업부 산업기반실장은 “포항시와 지역 기업의 현재 여건을 감안해 산업위기선제대응지역 지정 여부를 신속하게 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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