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화가 프란체스코 하예즈(Francesco Hayez)의 1859년 작 ‘키스’는 여러 면에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키스’와 비교된다. 하예즈의 ‘키스’는 클림트의 것에 비해 반세기 앞서 그려졌고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두 그림의 차이는 고전적 사실주의와 아르누보 스타일의 형식적인 것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클림트의 입맞춤은 존재의 심연에서 충동질하는 에로티시즘을 웅변한다. 사적이고 감각적이다. 상대는 에밀리 플뢰게라는 여인으로 특정된다. 그림에서 플뢰게는 감정에 도취돼 있다. 반면 하예즈의 것은 사적이지 않다. 이 입맞춤을 견인하는 힘은 역사성이요, 상징성이다.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분열된 조국 이탈리아의 통일에 대한 염원이다. 남녀상열지사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서사적 공명, 이 시대가 잃어버린 비장미가 이 미학의 진앙이다. ‘에로티시즘적 사랑 외에 모든 건 하찮을 뿐’이라는 현대적 슬로건이 습관적으로 폄훼하는 바로 그 미학이다.
하예즈의 입맞춤도 하나됨을 갈망한다. 하지만 이별이 예고된 뼈아픈 갈망이다. 남자는 더는 여인 곁에 머물 수 없고 여인도 들이닥칠 이별을 모르지 않는다. 애국자는 언제나처럼 위험에 처할 것이고 아마도 전장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조국의 부름으로 발은 이미 문 너머 전장을 향하고 있다. 운명의 부름은 피할 길이 없고 그것마저 수용하는 힘 없이는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겐 클림트의 입맞춤이 압도적으로 익숙하다. 하지만 금빛의 반짝거리는 달콤함도 값비싼 대가를 요구한다. 클림트의 고백에 그 자신이 지불해야 했던 대가의 일부가 서술돼 있다. “나 스스로도 내가 어떤 인간인지 정확하게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내가 가련한 바보라는 사실이다.” 이 고백은 자신이 사랑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으로 끝맺는다. 우리의 줄어들지 않는 상심의 한 까닭을 하예즈의 ‘키스’에서 마주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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