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이 개발한 인공지능(AI) 기술을 공공기관이 먼저 구매하고 사용해 관련 시장을 넓힐 수 있도록 조달 시스템을 개편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정부와 공공기관이 민간 AI 기술의 ‘퍼스트 바이어(최초 구매자)’가 되는 방식이다.
5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기획재정부는 이르면 다음 주 ‘새 정부 경제성장 전략’에 이 같은 대책을 담아 발표할 계획이다. 기재부의 한 관계자는 “현재 민간 AI 시장이 걸음마 단계에 불과한 만큼 정부가 구매자로 나서 시장을 만들어주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과거 김대중(DJ) 정부 때 전자정부법을 만들어 삼성SDS와 같은 정보기술(IT) 기업을 키워낸 성장 방정식을 AI 기업들에도 적용하겠다는 의미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최근 이재명 대통령에게 “정부가 AI 시장의 수요자가 돼달라”고 건의한 바 있다.
기재부는 이 같은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최근 공공기관 3급 이하 실무자 3000명을 대상으로 심층 서베이를 실시했다. 여기에 공공기관의 유휴 부지를 활용해 AI 데이터센터를 확충하고 공공기관 평가에 AI 활용 점수를 반영하는 방안도 추진하기로 했다. 공공기관을 평가하는 공공기관운영위원회 산하에 AI 소위원회도 신설된다.
공공, 민간 AI 기술 선구매로 AI 수요 촉진
공공기관이 민간 기업의 AI 기술과 솔류션을 적극 사용하도록 생태계를 바꾸기로 한 데에는 그동안 AI 기반 신기술이 공공시장에 제대로 진입하지 못해 AI 시장 생태계가 조성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공기관의 AI 선구매·실증이 기대만큼 속도를 내지 못하는 배경에는 짧은 사업 기간이라는 구조적 제약이 주요 원인으로 거론된다.
통상 정부나 공공기관이 발주하는 공공정보화 사업은 일반적으로 예산 연도에 맞춰 1년 단위로 기획된다. 이 때문에 1년 안으로 끝내려는 구조가 고착화되어 있는데다 계속사업비 예산 부재로 실증 사업을 계속 수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다. AI 실증 사업만 봐도 과기부 등의 단년도 공모사업에 의존하고 있고 계속사업비로 지정되지 않은 경우가 많아 사업의 지속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에 정부는 AI와 같은 초혁신 기술에 대해 중장기 지속성을 전제로 단년도·단기 납품 중심의 조달 체계를 전면 개편하고 계속사업비 예산을 증액하기로 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민간 AI 실증을 확대하기 위해 예산이 보장돼야 한다”면서 “예산 증액은 새 정부 경제성장전략과 내년도 예산안에 반영된다”고 말했다. 구윤철 부총리는 최근 여러 부서에 “현재의 조달 방법으로 AI 신기술 도입하는데 한계가 있어 초혁신 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재부, 해외 사례도 참조…"일본, AI 솔류션 1호 구매자"
기재부가 공공기관의 AI 기술 활용을 참고하고 있는 사례는 중국과 일본이다. 지난해 중국 선전 인민병원은 텐센트 헬스가 개발한 AI 모델을 처음으로 병원에 도입했는데, 운영 효율성이 1.5배 이상 증가하고 사용자 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병원이 AI 모델 구축 대가를 지불했고 텐센트는 해당 시스템을 통해 AI 기술을 고도한 뒤에 이를 다른 사업과 고객에게 확산시키며 수익을 창출했다는 것이 기재부의 설명이다. 민간 기업에게 기술 실증의 장을 마련하고 동시에 시장 진출 기회까지 연결해주는 것이다. 이와 함께 AI 스타트업의 솔류션을 일본 정부가 1호 구매자로 나서 선순환의 생태계를 구축한 사례도 함께 참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지난해 창업 1년 만에 기업가치 10억 달러(1조 4000억원) 유니콘 기업으로 발돋움한 사카나 AI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 정부가 초기 구축에 수백억원의 규모의 자금이 필요한 GPU를 무상으로 지급하고 민간 기술을 적극 선구입했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됐다. 정부가 1호 구매자로 나서 기업들에게 일감을 공급하고 여기에 나오는 자금으로 기업들이 생존하면서 실력을 키우는 구조가 이미 일본에 정착돼 있다.
AI데이터센터 부지도 공공이 마련…공공기관 부지 활용
이와 함께 정부는 AI 산업 활성화를 위한 4대 인프라 축을 △그래픽처리장치(GPU) △전력망 △AI 데이터센터 △거버넌스(제도·규제)로 규정하고 이를 확충할 방안을 새 정부 경제성장 전략에 제시할 방침이다. 초기 투자 비용이 막대한 GPU 직접 구매를 늘리고 AI 데이터센터는 공공기관의 유휴 부지를 활용해 수용성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가령 AI 데이터센터 건립은 기피시설이라 지역 주민 반대가 많아 AI데이터센터 건립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정부가 공공기관이 보유한 부지와 건물을 최대한 활용해 현 정부 임기 내에 전국 단위의 AI 데이터센터와 전력망을 최대한 확충하기로 했다. 또 공공기관의 AI 활용 실적을 정량화해 경영평가에 반영하는 방안도 도입된다. 예산·조직 등 실질적인 인센티브를 AI 활용도에 따라 차등 부여함으로써 공공 내부의 AI 수요와 역량을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특히 기재부는 최근 공공기관 3급 이하 실무자 3000명을 대상으로 심층 서베이를 진행한 결과를 바탕으로 공공기관의 AI 활용도를 높이는 방안도 마련했다. 이에 공공기관운영위원회 산하에 AI 소위원회를 신설해 AI 전담 인력 확충, 예산 증액, 거버넌스 개편 등을 통해 AI 정부 이행을 본격 추진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산재사고 예방 기조에 동참하기 위해 공공기관 사업장에 AI 로봇도 적극 투입해 안전사고 제로도 추진하고 한국인터넷진흥원과 같이 AI 전문성이 큰 기관이 전문성이 부족한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협업하는 시스템도 경제성장전략에 반영되는 것으로 파악됐다.
정부의 이 같은 방침은 서울경제신문이 올 4월 'AI 정부로 가자’ 시리즈를 통해 정부의 조직 개편, 발주·예산 확대를 통한 AI 생태계 구축의 필요성을 제언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앞서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지난달 AI 글로벌 협력 기업 간담회에서 이재명 대통령에게 “정부가 AI 시장의 수요자가 돼달라”며 AI 정부를 공식 건의했다.★본지 4월 9일자 1·2·3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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