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횡령 사건은 상당수가 우연히 알게 된 ‘빈틈’에서 시작됩니다. 계좌에 CCTV를 달면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되는 것을 초기에 막을 수 있습니다.” (고태관 민 E&I 대표 겸 변호사)
회계를 담당하는 한 직원이 A업체로 보낼 금액을 B업체로 잘 못 보낸다. 놀라서 사고를 수습한 직원은 회사에서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무도 모르네’. 직원은 자신의 계좌로 처음에는 소액을 입금한 뒤 여러 번에 걸쳐서 자신의 계좌로 입금을 한다.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되는 횡령 사건의 가장 일반적인 패턴이다.
경찰 출신의 고 변호사는 30년 간 형사 사건을 담당하면서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횡령·배임 등에 대한 직무 감사 기능이 거의 없다는 데 문제의식을 가졌다. 이후 법무법인 민의 자회사로 민 E&I를 설립해 동료 변호사 15명과 힘을 합쳐 3만 여 건의 횡령, 배임 관련 판례를 분석한 뒤 이를 패턴화해 이상 신호를 감지하도록 하는 횡령·배임 탐지 AI 서비스 ‘갖추’를 지난 15일 내놨다. 고 변호사는 16일 서울경제신문 인터뷰에서 “횡령의 경우 법인 계좌에 있는 돈을 인출하기 위해서는 현금 인출을 하거나 본인 계좌나 차명 계좌에 인출하는 방식밖에 없다”며 “사람은 24시간 동안 이를 감시하지 못하지만 법인 계좌에 박아둔 CCTV는 가능하다”고 말했다. 갖추는 은행·카드사·국세청·4대 보험 시스템 등 외부 플랫폼에서 실시간 데이터를 직접 끌어와 분석한다.
지난해 발표된 검찰 연감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검찰에 횡령·배임 혐의로 기소된 사건의 수는 3966건에 달한다. 이 중 피해규모가 5억원 이상인 횡령은 전체의 15%인 612건으로 조사됐다. 바늘도둑이 소도둑된 사례다. 고 대표는 “횡령 범죄의 경우 시간이 지나고 금액이 누적될 수록 피해 규모가 커져 회수가 어려운 게 특징”이라며 “가능한 첫 범죄 행동 때 이를 포착해 잡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갖추는 월 6만9000원부터 시작하는 횡령 탐지 구독형 서비스 외에도 기업 맞춤형 서비스와 금융기관용 구축형 솔루션을 별도로 제공한다. 배임의 경우는 보통 공모자가 회사 내 다른 부서나 외부 협력사 등에 존재하다 보니 기업별, 분야별로 다르게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 대표는 “예를 들면 보안 경비 서비스의 경우 과거에는 니즈가 없었지만 지금은 작은 가게까지 안 쓰는 곳이 없다”며 “공금이 엉뚱하게 도둑질당하지 않는 신뢰할 수 있는 시장을 만드는 차원에서 인식을 높이고 싶다”고 강조했다.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은 기존에 확보한 데이터와 오랜 감사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금사고 패턴을 반영해 10개 이상의 탐지 모듈을 적용한 서비스 ‘라이트하우스’ 솔루션을 서비스하고 있다. 금융 솔루션 기업 웹케시도 AI에이전트 서비스인 ‘AI CFO’에 이상 거래 감지 기능을 탑재해 고객들의 수요에 대응하고 있다. 이외에도 신분증 위조·도용 방지 솔루션 유스비(USVB)의 경우 금융권을 중심으로 활발히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금융 범죄의 지역적 경계가 허물어 지면서 횡령·배임을 비롯해 자금 세탁, 사기를 포착하는 서비스 또한 확산될 것”이라며 “횡령 솔루션을 시작으로 레그 테크 시장도 본격적으로 열리는 단계에 있다”고 짚었다.
한편 글로벌 시장 조사기관 포춘 비즈니스 인사이트에 따르면 글로벌 기업의 컴플라이언스 분야 문제를 AI로 해결하는 레그 테크(Reg-Tech) 시장은 지난해 150억8000만 달러(약 21조원)에서 2032년 827억7000만 달러(약 115조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한다. 연평균 성장률(CAGR)은 22%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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