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에 있는 한국천문연구원 한국우주전파관측망(KVN) 연세전파천문대를 가봤다. 지름 21m짜리 전파망원경 안테나가 그늘을 드리워서 무더위 속에서도 서늘했다. 안테나는 등대처럼 직접 올라갈 수도 있었다. 3층 높이 계단을 딛고 올라가니 안테나의 정중앙에 접근할 수 있었고 그곳에는 수신실이 있었다. 사람 두세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좁은 공간에 각종 서버와 장치·전선이 오밀조밀 모여 흡사 컴퓨터 본체 내부 같았다.
수신실은 벽에도 바닥 장판이 깔린 모습이었다. 안테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각도에 따라 수신실 자체도 최대 90도씩 회전하기 때문에 벽과 바닥의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이날 방문 당시 전파망원경 안테나는 해바라기처럼 고개를 90도 숙이고 있던 덕에 쉽게 수신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안테나가 하늘 방향인 천정(天頂)을 바라보고 있을 때는 수신실도 다락방 올라가듯 거의 수직으로 올라가 문을 열어야 한다.
안테나의 중심에는 집속기가 있다. 오목한 접시에 부딪혀 반사된 전파가 한데 모여 수신실로 들어오는 통로다. 실제로 수신실 한쪽 벽은 성인 키만한 구멍을 두꺼운 스티로폼 벽이 막고 있었는데 이것이 집속기라고 했다. 안테나가 천정 방향으로 90도 회전한다면 이 원형 창문 같은 집속기도 벽이 아닌 천장이 되는 셈이다.
집속기로 들어온 전파는 반사경에 맡아 ‘로패스 필터’라고 부르는 빛가르개로 이동한다. 로패스 필터는 지름 20㎝, 구리색의 반도체 웨이퍼 3개를 나열한 것처럼 생겼다. 반사와 투과를 통해 전파를 주파수별로 분리하는 장치라고 한다. 실제로 이를 통해 전파는 22·43·86·129㎓(기가헤르츠)의 네 주파수 신호로 나뉘고 역시 네 수신기가 각각의 신호를 받아들인다.
여러 주파수 신호를 동시에 관측하는 이곳 ‘동시관측 수신기’는 이탈리아에 수출까지 한 한국 독자 기술이다. 한 가지 색보다 여러 가지 색으로 이미지를 더 잘 표현할 수 있듯 여러 주파수 신호로 구현한 이미지를 합치면 관측 정밀도를 더 높일 수 있고 이에 필요한 기술이 동시관측 수신기다.
연세전파천문대에서 본 동시관측 수신기는 개별 수신기 4개와 반사경, 로패스 필터 조합으로 겉보기엔 단순해보였다. 하지만 안 그래도 미약한 전파 신호를 반사·투과 과정에서 손실되지 않도록 하고 분리된 신호들이 동시에 각각의 수신기에 도달하도록 하는 일은 선진국에서도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이 같은 ‘다중 주파수 동시관측 기술’은 해외에서 ‘KVN 스타일’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다.
천문연은 KVN 스타일을 앞세워 내년 3월 본격적으로 시작될 ‘차세대 사건의 지평선 망원경(ngEHT)’ 프로젝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됐다. 앞서 천문연이 참여한 ‘사건의 지평선 망원경(EHT)’은 2019년 세계 최초로 블랙홀을 직접 관측한 프로젝트다. ngEHT는 그 후속 프로젝트로 블랙홀 이미지를 넘어 동영상을 찍는 게 목표다.
ngEHT는 블랙홀이 내뿜는 230㎓와 345㎓ 신호 관측에 집중해왔지만 86㎓를 동시에 관측해 데이터를 더 정확하게 보정할 수 있다는 판단이 나왔다. 연세전파천문대에서도 본 86㎓ 수신기는 마침 천문연이 국제표준까지 받으며 기술 우위를 가진 데다 86㎓를 230㎓와 동시에 관측하는 기술도 앞선 설명대로 천문연의 주특기다.
천문연은 한발 더 나아가 230㎓ 수신기를 추가해 블랙홀을 직접 관측하는 능력도 갖출 계획이다. EHT 임무에서 해외 기관들만 230㎓ 수신기로 블랙홀을 직접 관측했고 천문연은 이를 다른 주파수 관측으로 보정해주는 간접적 역할만 했다면 ngEHT 임무에서는 직접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날 연세전파천문대는 조만간 이뤄질 전파망원경 업그레이드를 앞두고 분주한 분위기였다. 이달 12일 강원 평창군에 개소한 네 번째 전파망원경 ‘KVN 서울대평창전파천문대’ 역시 230㎓ 수신기를 갖췄다.
KVN은 연세와 평창까지 전파망원경 4개, 이들 간 거리인 기준선(기선)은 최대 500여㎞에 달한다. 전파망원경은 서로 멀리 떨어진 것들끼리 신호를 취합해 가상의 대형 망원경을 구현할 수 있다. 초장기선전파간섭계(VLBI)라는 기술이다. 이때 기준선은 가상 망원경의 렌즈 크기에 해당해 중요한 성능 지표로 여겨진다. EHT는 전 세계 30여개 기관이 모여 지구 지름에 맞먹는 최대 1만 2000㎞의 기준선을 자랑한다. 지구 크기의 가상 망원경으로 블랙홀을 관측하는 셈이다. 그외 미국, 중국, 일본도 넓은 국토를 활용해 수천㎞ 기준선을 구현할 수 있다.
정부는 한편 지난달 14개국 공동 ‘국제 거대 전파망원경(SKA)’ 프로젝트에도 합류했다. SKA는 우주 초기의 모습 관측에 도전한다. 빅뱅 직후인 130억여 년 전의 과거를 보려면 130억여 광년 떨어진 먼 거리에서 오는 신호를 포착해야 한다. 한국과 영국·독일·중국·인도 등 14개국이 2029년까지 총 2조 9000억 원을 들여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호주에 안테나 13만 여개를 건설할 계획이다. 이는 세계 최대 전파망원경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가 전파망원경 경쟁력 확보에 공들이는 이유는 이 기술이 별과 블랙홀 관측 같은 기초연구는 물론 우주 탐사선 위치를 세밀하게 탐지하고 상공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우주활동도 감시할 수 있는 산업·안보 자산으로 주목받고 있어서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지름 500m의 ‘톈옌’, 미국도 수백m짜리 망원경들을 갖췄다.
전파망원경은 전파로 멀리 떨어져 있는 별이나 블랙홀을 관측하는 망원경이다. 전파는 우리 눈에 보이는 가시광선보다 주파수가 낮은 또 다른 빛이다. 주파수는 빛이 1초 동안 진동하는 횟수다. 이것이 낮을수록 장애물을 넘어가는 회절성이 강해진다. 우주 먼지 같은 장애물에 잘 가로막히는 가시광선과 달리 전파는 회절성 덕에 장애물을 잘 넘어다녀 먼 거리에도 전달된다. 통신과 방송의 신호 전달에도 전파가 쓰이는 이유다. 오늘날 상식이 된 우주 팽창 발견을 포함한 여러 노벨상 업적도 전파망원경 연구 성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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