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연구진이 심부전의 주요 원인인 심근병증 발병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밝혀냈다. 대규모 연구를 통해 심장조직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세포 구성과 유전자 발현 차이를 처음 규명하면서 심근병증 치료제 개발의 새로운 단초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상언 서울아산병원 심장내과 교수와 황희상 병리과 교수 공동 연구팀은 심장조직 내 특정 위치에서 어떤 유전자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공간 전사체학(spatial transcriptomics)'을 활용해 심근병증 환자 37명을 분석한 결과, 심근병증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세포의 종류 뿐 아니라 섬유화·퇴행 등 조직의 손상 양상에 따라 유전자 발현이 달라지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9일 밝혔다.
심근증은 심장 근육 자체가 약해지거나 두꺼워지는 질환이다. 심장이 몸에 혈액을 충분히 공급하지 못해 숨이 차고 쉽게 피로해진다. 심한 경우 심장이식을 받아야 하거나 젊은 나이에도 급사로할 수 있다. 심장이 늘어나는 확장성, 심장 벽이 두꺼워지는 비대성, 심장근육 일부가 혈액을 공급하지 못하는 허혈성 등 유형이 다양하고 발병 원인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치료도 원인 보다 생리적 반응을 조절하는 치료가 주로 시행됐다. 심근병증은 환자마다 양상이 다양하고 복잡할 뿐 아니라 환자 한 명의 심장조직 내에서도 세포 구성이나 손상 정도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기존 분석법으로는 심근병증을 정밀하게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연구팀은 2018년 1월부터 2021년 4월까지 심근병증 환자 37명과 대조군 7명의 심장조직에서 1만 2800개의 유전자를 도출해 분석했다. 세포 내 유전자 발현을 분석하는 기존 기술에 조직 내 위치 정보를 결합한 분석법인 '공간 전사체학'이 쓰였다. 정상 조직이나 손상 여부에 관계 없이 특정 부위에서 어떤 세포가 어떤 유전자를 발현하는지를 시각화할 수 있는 최신 분석법이다. 조직이 손상되는 양상에 따라 세포별 유전자 변화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지도로 그리듯 보여준다고 이해하면 쉽다.
분석 결과 심장근육 세포가 손상되거나 기능을 잃는 퇴행성 변화가 나타날 때에는 단백질 분해와 관련된 UCHL1 유전자의 발현이 증가했다. 손상된 심장조직을 회복하려는 과정에서 섬유화가 진행될 때는 염증 반응을 유도하고 섬유화를 촉진하는 특수한 세포 유형이 관찰됐으며, 이들은 ACKR1·PLVAP·CCL14 유전자를 함께 발현하는 특징을 보였다.
연구팀은 심근병증 환자의 심장조직 중에서도 심장 기능이 비교적 유지된 초기 보상기와 기능이 급격히 저하된 말기 비보상기 상태에서 서로 상반되게 조절되는 유전자들을 발견했다. 이 과정에서 TAX1BP3·PFKFB2·CRIP3 등 종전까지 심근병증과의 연관성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유전자를 새롭게 규명하는 성과를 냈다. 학계에서는 이들 유전자가 향후 심근병증을 유발하거나 진행을 결정짓는 핵심 표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또한 전 세계 어떤 연구자라도 직접 데이터를 탐색하고 활용해 심근병증의 복잡한 병태생리를 추가로 연구할 수 있도록 웹 기반 플랫폼을 구축했다. 공간전사체 기반 빅데이터의 개방을 통해 심근병증 관련 연구를 더욱 활성화하려는 취지다.
황 교수는 "이번 연구는 기존의 유전자 분석이 간과했던 세포별, 부위별 차이를 반영해 심근병증을 분석한 최초의 연구"라며 "이를 바탕으로 심근병증의 병태생리 기반 정밀진단이 가능해지고 향후 정밀의학 기반 맞춤치료제 개발에도 큰 단서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다양한 병리적 양상과 세포 반응을 정밀하게 분석할 수 있는 기반 데이터를 구축했다"며 "궁극적으로 심근병증 자체를 표적하는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연구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는 보건복지부의 '연구중심병원 육성 연구개발 사업과제' 지원을 받아 미국 스크립스연구소(Scripps Research)·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공동으로 진행됐으며 국제학술지 '유럽심장학회지(European Heart Journal)' 최근호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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