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에서 치킨집을 운영하는 A 씨는 대출을 위해 시중은행을 방문할 때마다 부동산 담보나 지역신용보증재단의 보증서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담보나 보증이 없으면 사업주 개인 신용대출을 받아야만 한다. 사업 매출이 좋아도 개인신용이 낮거나 보증서가 없으면 대출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음식점을 운영하는 B 씨는 중저신용자를 대상으로 한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의 대출 보증서를 발급 받기 위해 인터넷에서 개인신용도를 낮추는 방법을 알아본다. 신용점수를 일부러 낮춰 소진공의 대출을 신청하려는 것이다. 금융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27일 “사업 현황을 감안한 진정한 의미의 시중은행 개인사업자 대출이 없다”며 “제대로 된 신용평가나 사업성 분석 없이 복지 정책 차원에서 접근하다 보니 곳곳에서 나랏돈이 새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를 위한 금융 지원이 급증하고 있지만 제대로 된 효과를 내지 못한 채 ‘돈 퍼주기’에 그치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신용보증재단중앙회와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2013~2014년 5조 원대였던 지역 신보의 신규 보증 공급액과 정부의 소상공인 지원 융자는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로 8조 2455억 원으로 급증했다. 이후 2018년까지 7조~8조 원대를 유지하다 코로나19 시기인 2020년 27조 2894억 원까지 커졌다. 정부는 이후 2021~2024년 이 액수를 12조~16조 원 수준으로 관리했지만 최근 추가경정예산안을 발표하면서 18조 4700억 원 규모로 증액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하지만 금융계 안팎에서는 이들 사업이 밑 빠진 독에 가깝다는 얘기가 나온다. 신보재단중앙회가 2023년 1월부터 지난해 4월 말까지 지역 신보 보증을 받은 업체 3319곳에게 설문한 결과에 따르면 보증 당시와 비교했을 때 현재 순이익이 증가했다고 답한 비율은 23.1%에 불과했다. 되레 순이익이 감소한 비중(32.9%)이 10%포인트 가까이 높았다. 소상공인 지원 융자도 마찬가지다.
부실도 커지고 있다. 지난해 지역 신보의 일반 보증 대위변제액은 전년보다 40.1% 증가한 2조 3997억 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소진공의 융자 지원 사업 부실률은 10.9%에서 15.5%로 뛰며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제대로 된 사업 평가 없이 매년 천문학적인 규모의 정부 지원이 집행되다 보니 자영업자의 경영 개선 효과 없이 부실만 커지고 있다. 내수 침체 요인을 무시할 수 없지만 은행은 안전한 보증서만 찾고, 지역 신보는 부실이 생기면 금융권에 추가 출연을 요구하면 돼 까다로운 심사나 기준 없이 ‘묻지 마’ 식 보증서 발급을 계속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소상공인 정책금융 체계 전반을 뜯어 고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구체적으로 △시중은행의 실질적인 금융 지원 유도 △개인사업자 대상 신용평가사 활성화 △중소기업벤처부 정책금융 축소 △보증서 한도 정상화 등이 거론된다. 금융계의 고위 관계자는 “시중은행 내 개인사업자 신용평가 인프라를 강화하고 금융 당국이 인센티브와 가이드라인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자영업자 대출이 늘 수 있게 유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개인사업자 전업 신평사를 활성화하는 것도 대안이다. 현재 자영업을 전문으로 하는 신평사는 2022년 출범한 한국평가정보가 유일하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에 대한 신용평가를 시중은행이 일일이 하기 힘든 부분도 있는 만큼 전업 신평사가 이를 대신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금융계의 또다른 관계자는 “제대로 된 신용평가가 대출의 근간”이라며 “전업 신평사의 경우 개인사업자 및 법인 형태에 관계없이 모든 소상공인에 대해 신용평가 업무를 허용하고 매출과 매입, 통신비·전기료 등 관련 데이터를 한데 모아 활용할 수 있는 인프라를 확대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중기부의 정책금융 비중은 점진적으로 낮추고 도덕적 해이 우려가 큰 90% 수준의 보증 한도도 정상화해야 한다는 얘기가 많다. 임채운 서강대 경영대학 명예교수는 “현재 소상공인 정책금융 공급이 지나치게 많다는 비판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며 “개인사업자에 대한 신용평가가 활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정부 지원책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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