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당초 발표보다 2조 원 늘린 12조 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안을 편성해 늦어도 다음 주 초 국회에 제출하기로 했다. 미국 정부의 품목별 관세 부과가 예고된 반도체 산업에 대한 지원도 기존 26조 원에서 33조 원으로 확대한다.
정부는 지난 15일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열린 경제·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회의에서 이 같은 내용이 담긴 ‘필수 추경안’과 ‘글로벌 반도체 경쟁력 선점을 위한 재정 투자 강화 방안’을 발표했다.
필수 추경 규모는 12조 원대로 최종 확정됐다. 신속한 산불 피해 복구를 위해 재해대책비를 기존 5000억 원에서 2배 이상 늘리는 등 재해·재난 대응에 3조 원 이상을 투입한다.
급격한 통상 환경 변화에 대응하고 첨단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4조 원 이상을 투자한다. 1조 원 안팎으로 예상됐던 인공지능(AI) 분야 지원 규모는 1조 8000억 원으로 늘려 연내 그래픽처리장치(GPU) 1만 장을 추가 확보하기로 했다.
관세 피해 기업의 자금난 해소를 위해 25조 원 규모의 정책자금도 신규로 공급한다. 이를 위해 재정을 통한 수출입은행 등의 자본 확충도 추진된다. 소상공인 및 취약 계층을 위해서도 4조 원 이상을 지원한다. 소상공인에게는 연간 50만 원 한도로 공공요금 ‘부담 경감 크레딧’을 지급한다. 이 크레딧은 전기·가스 등 공공요금과 보험료 납부 등에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바우처다. 포퓰리즘성 현금 지급 논란을 피하면서도 소상공인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을 내놓은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산업에 대한 지원도 기존 26조 원에서 33조 원으로 7조 원 늘릴 예정이다.
내수부진·불확실성 심화에 증액…영세사업장 결제액 '상생페이백'
정부가 당초 10조 원이었던 추가경정예산안 규모를 12조 원으로 늘려 잡은 것은 내수 부진이 예상 이상으로 심각하다는 진단 때문이다. 미국 정부의 관세정책 혼란으로 소비심리가 극도로 위축돼 올해 1% 초반대 성장에 그칠 수 있다는 게 정부 내부의 분위기다. 여기에 인공지능(AI) 등 기술 패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소한의 마중물 역할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풀이된다. 전문가들은 추경안의 윤곽이 나온 만큼 국회가 신속히 처리해 집행의 속도를 높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번 추경안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책은 1인당 연간 50만 원씩 지급하는 ‘소상공인 부담경감 크레딧’이다. 이 크레딧을 전기·가스 등 공공요금과 보험료 납부 등에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게 정부의 계획이다. 그동안 비판을 받아왔던 포퓰리즘성 현금 지급 논란을 피하면서도 소상공인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을 내놓은 것이다.
앞서 더불어민주당은 전 국민에게 25만 원의 소비쿠폰(지역화폐)을 지급하자고 주장했으며 국민의힘은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100만 원 규모 바우처를 지원하자고 요구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정부 재정 여건이 빠듯해 재정 건전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지원 대책을 내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만약 연매출 1억 400만 원 미만의 소상공인 약 760만 명을 대상으로 크레딧을 지급한다고 가정하면 소요 예산은 총 3조 8000억 원(760만 명×50만 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이날 구체적인 자격 조건 등을 공개하지 않았다.
얼어붙은 소비심리를 녹이기 위한 대책도 마련됐다. 전년 대비 카드 소비가 늘어난 소비자에게 소비 증가분의 일부를 전통시장 등에서 현금처럼 쓸 수 있는 온누리상품권으로 환급하는 ‘상생페이백 사업’이다. 상생페이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전체 카드 사용 내역이 아니라 약 306만 곳의 연매출 30억 원 이하 영세·중소 카드가맹점에서 긁는 금액만 실적으로 인정해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이 같은 긴급대책을 내놓아야 할 정도로 현재 소비심리는 최악 수준이다. 지난해 전국에서 일반음식점과 휴게음식점을 통틀어 총 10만 7526곳의 음식점이 폐업했다. 행정안전부가 지방행정인허가 관련 자료를 수집해 공개한 이래 사상 최대 규모다. 지난해 폐업률은 일반음식점(10.4%)과 휴게음식점(17.3%) 모두 신용카드 대란 때인 2005년(일반음식점 11.2%, 휴게음식점 17.3%) 이후 약 2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다. 문을 여는 곳보다 닫는 곳이 더 많았던 탓에 지난해 일반음식점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감소했다. 소비가 살아나지 못하면서 전년 동월 대비 숙박 및 음식점업 생산지수(불변 기준)는 2월 3.8%나 감소했다.
AI분야도 1.8조 규모로 증액…"AI 3대 강국 진입 속도 높일 것"
당초 1조 원 규모였던 AI 분야에 대한 투자 규모를 1조 8000억 원 이상으로 늘린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AI 3대 강국 진입을 위한 지원을 더욱 속도감 있게 추진하겠다”며 “추경을 통해 1조 8000억 원을 투입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올해 본예산인 1조 8000억 원과 동일한 규모다. 최근 주요 대선 후보들은 수백조 원 단위의 AI 투자 공약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확충된 투자 재원은 연내 첨단 그래픽처리장치(GPU) 1만 장 확보와 팹리스(설계전문) 기업들이 공동 활용할 수 있는 고성능 AI 반도체 실증장비 2대 추가 도입 등에 쓰일 예정이다.
미국발(發) 관세피해·수출위기 기업에 대한 저리 대출 등 정책자금 25조 원도 신규 공급된다. 관세대응 수출바우처 지원기업도 2배 이상 늘린다. 올해 본예산에는 5641곳의 중소·중견기업이 지원받을 수 있는 914억 원이 배정돼 있는데 추경을 통해 관련 예산이 바닥나지 않도록 추가 편성하겠다는 것이다. 신속한 산불 피해 복구를 위한 재해대책비를 기존 5000억 원에서 2배 이상 보강하고 중대형급 산림헬기 6대, AI 감시카메라 30대, 드론 45대 등 첨단장비 도입비용도 추경안에 반영한다.
김상봉 한성대 교수는 “산불 피해 복구를 위해서라도 추경 편성과 집행은 불가피하다”면서도 “무작정 돈을 뿌리기보다는 AI 등 미래에 대한 투자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용인·평택 클러스터 송전선로 구축 지원…첨단기금 저리대출 규모 17조→20조
정부는 용인·평택 반도체 클러스터 송전선로 지중화 작업 비용을 지원하기로 했다. 송전선로는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 공급을 위한 필수 기반시설이지만 주민 반발과 비용 부담 등으로 인해 사업에 속도가 붙지 못했다. 송전선로 지중화 비용으로는 1조 8000억 원가량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는 이 비용의 70%를 국비로 지원하며 그중 올해 지원할 금액인 626억 원을 추가경정예산에 반영한다는 계획이다.
50조 원 규모의 첨단전략산업기금 가운데 반도체 저리대출 지원 프로그램 규모도 기존 17조 원에서 20조 원으로 상향한다. 정부보증채와 산업은행 출연금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고 구체적 지원 방식은 초저리대출·지분투자·후순위보강 등에서 수요자는 원하는 형태로 지원한다. 정부는 기금을 출연하는 산은의 재정 건전성 지원을 위해 필요 시 재정 출자를 검토한다.
첨단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분야 중소·중견 기업에 대한 투자보조금도 신설한다. 정부는 중소·중견 기업의 입지와 설비 신규 투자액의 30~50%를 보조금으로 지원할 계획이다. 가령 비수도권에 위치한 매출 1000억 원 규모의 소부장 반도체 분야 중소기업이 올해 100억 원의 설비투자를 추진할 경우 정부 보조금 50억 원을 받을 수 있다. 또 올해 투자분에 대해 30%의 세액공제가 적용돼 최종적으로 65억 원의 혜택을 받게 된다.
아울러 정부는 차세대 반도체 분야에서 기술혁신 역량과 글로벌 성장 잠재력을 보유한 팹리스 기업 20개사를 ‘스타 팹리스’로 선정할 계획이다. 이들 기업에는 연구개발(R&D) 자금을 집중 지원해 차량용 반도체 등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을 촉진한다. 첨단 반도체 양산 연계형 미니팹(성능평가시설) 구축 사업에는 2031년까지 4469억 원을 투입한다. 미니팹을 기반으로 첨단 기술개발과 전문 인재양성 등 K반도체 혁신생태계(한국형 IMEC) 조성도 추진한다. 최 부총리는 “AI 최고 인재가 겨루는 ‘글로벌 AI 챌린지’ 우승팀에는 후속 연구비를 파격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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