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0대 건설사의 수주 잔액이 2년 연속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다. 굵직한 해외공사는 끝나가는 반면 투자 위축 등 여파에 국내 신규 수주가 줄어든 영향으로 풀이된다. 대형 건설사마저 장기 침체 공포에 빠지면서 중소·중견 기업으로 일감이 분산되는 낙수효과가 위축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7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등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시공능력평가 상위 10개 건설사의 수주잔액은 384조 원으로 전년(377조 원) 대비 1.8% 증가하는 데 그쳤다. 대형 건설사의 수주잔액은 △2020년 305조 원에서 △2021년 354조 원 △2022년 377조 원으로 연평균 약 10%씩 성장해왔다. 그러나 2023년부터 2년 연속 정체기를 걷고 있다. 매출액 대비 수주 잔액을 뜻하는 수주 잔액 비율도 2020년 3.7배에서 지난해 3.4배로 낮아졌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2월 수주 잔고 지수는 67.9로, 지난해 4월(66.1) 이후 약 10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 지수가 100 아래면 현재의 수주 잔고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는 건설사가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10대 건설사 중 절반은 수주 잔액이 지난해보다 감소했다. 현대엔지니어링은 2023년 31조 원에서 지난해 28조 원으로 줄었다. 같은 기간 삼성물산은 27조 7240억 원에서 27조 7150억 원으로 전년 대비 수주잔액이 3년 만에 역성장했다. 2021년 삼성디스플레이가 발주한 아산 공장(8436억 원), 기흥 신사옥(1조 2330억 원) 등 공사가 마무리된 영향이 크다. 2022년 수주한 카타르 QP 태양광 발전소도 지난해 말 완공하며 총 도급액 8539억 원 중 875억 원의 잔액만 남았다. 대우건설과 DL이앤씨도 수주잔액이 줄었다.
‘곳간’이 비어가는 가운데 신규 수주는 줄고 있다. 10대 건설사는 올해 수주 목표액으로 96조 원을 잡았다. 이는 지난해(92조 원)보다 4% 소폭 늘어나는 데 그친 규모다. GS건설은 올해 신규수주 목표로 전년 대비 약 28% 감소한 14조 3000억 원을 제시했다. 주택 비중을 늘리는 대신 해외 플랜트와 신사업 수주 목표액을 낮춘 데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HDC현대산업개발도 지난해 수주실적보다 적은 4조 7000억 원을 수주 목표액으로 설정했다.
실제 대한건설협회에 따르면 올해 1~2월 국내 건설사들의 주거용 건축 수주액은 7조 3581억 원으로 전년 동기(10조 975억 원)대비 약 27% 감소했다. 공사비 급등에 재개발·재건축 추진 동력이 약해지면서 발주 자체가 줄어든 데다 수익성 훼손을 우려한 건설사들이 선별 수주 전략을 강화한 여파다.
건설사들이 신규수주에 소극적으로 나서는 가장 큰 요인은 수익성 악화다. 급등한 자잿값과 인건비에 ‘적자 공사’가 늘어나자 수주 기피현상이 심화하고 있는 것이다. 10대 건설사의 지난해 평균 매출 원가율(매출액에서 원가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92%로, 3년 전(87%)보다 5%포인트 높아졌다. 여기에 1400원 중반대의 고환율로 올해 건설용 중간재 수입물가가 크게 오른 것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정부는 올 상반기 중 연간 사회간접자본시설(SOC) 예산의 약 70%를 조기 집행하기로 했지만, 민간 투자가 위축된 상황에서 효과가 제한적일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해 국내 건설사 전체 수주실적(209조 원)에서 공공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30%에 불과하다.
대형 건설사의 경영 환경이 나빠지자 중소·중견 건설사들의 시름도 깊어지고 있다. 건설산업지식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들어 이날까지 폐업을 신고한 종합공사업체는 170건으로 전년 동기(147건) 대비 16% 증가했다. 벽산엔지니어링·삼부토건·대우조선해양건설 등 법정관리 절차를 밟는 중견 건설사들도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지방 중견 건설사의 한 관계자는 “매출의 절반 이상을 대형사의 하도급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2021년 건설경기 호황 때 수주했던 공사들이 올해 대부분 마무리되기 때문에 연말 수주잔액 절벽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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