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국내 수입이 금지됐던 위스콘신·콜로라도 등 미국 11개 주(州) 감자가 연내 한국으로 들어올 것으로 보인다. 우리 정부가 이들 11개 주 감자에 대한 검역 절차를 사실상 마무리하면서다. 다음 달 2일(현지 시간) 상호관세 부과를 선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자국산 감자에 대한 수입 물량 제한 등 비관세장벽 완화를 우리나라에 요구할 경우 국내 농가가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23일 관가에 따르면 농림축산식품부와 농림축산검역본부는 지난달 말 식물검역위원회를 개최하고 미국 11개 주 감자의 병해충 위험 관리 방안을 확정했다. 병해충 위험 관리 방안은 외국산 식물의 수입 여부를 결정할 때 국내 생태계에 미치는 피해를 따져보는 마지막 과학적 절차다. 이후 초안 작성, 행정 예고, 수입 허용 고시 등의 행정 절차만 남아 사실상 수입 장벽을 넘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난해 3월 이 단계를 통과했던 미 텍사스산 자몽의 경우도 석 달 뒤인 6월 검역 협상이 최종 타결돼 수입이 허용된 바 있다. 이번 수입 완화에 따라 국내 시장에 들어올 수 있는 미국산 감자의 생산 물량은 기존에 수입이 허용됐던 미국 3개 주의 물량을 포함해 약 1700만 톤을 넘길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미국 전체 생산량의 약 90%에 이르는 것으로 우리나라 연간 생산량(55만 톤)의 31배에 이른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감자 수입 장벽을 크게 허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미국과 호주산 일부 감자만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일부 수입되고 있을 뿐이다. 가령 호주산의 경우 빅토리아주(州)와 웨스트오스트레일리아주를 제외한 주에서 생산된 뒤 빅토리아주 내 인가된 세척 시설을 거친 감자만이 국경을 넘을 수 있다. 미국산의 경우에는 아이다호·오리건·워싱턴주에서 생산된 감자만 수입을 허용하고 있다. 2022년 국내외 감자 생산량 급감 및 물류 대란 여파로 국내 햄버거 세트 메뉴에서 감자튀김이 빠지고 감자가 ‘금(金)자’로 불렸던 때도 우리나라는 감자 수입 장벽을 지켜왔다.
문제는 대량 수입이 가능해진 미국산 감자에 대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압박이 더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검역 장벽 완화는 조 바이든 행정부 때부터 추진된 일이지만 공교롭게도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 문호가 열리면서 더 큰 압박을 받게 된 셈이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다음 달 초 전 세계에 상호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압박하면서 각국과 개별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한국은 감자튀김·감자칩 등 가공용으로 쓰이는 감자에는 특정 계절(같은 해 12월~이듬해 4월)에만 관세를 없애고 이외 기간에는 38%의 관세를 부과하는 계절 관세를 적용하고 있다. 소비자들이 대형마트나 슈퍼에서 살 수 있는 일반 감자의 경우 저율관세할당(TRQ)을 통해 4406톤까지만 무관세를 적용하고 이외 수입분에 대해서는 304%의 고율 관세를 부과한다. 이런 관세 장벽을 통해 그간 미국산 감자 수입량은 연 1만~2만 톤(종자용 제외) 수준으로 유지돼왔지만 이 물량이 크게 늘어날 수 있는 셈이다.
실제로 통상 전문가들은 개별 협상 시 미국이 감자·쇠고기 등 농산물 수입 확대를 요구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21일 “미국은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감자와 같은 농산물 TRQ 물량을 더 풀라는 압박을 충분히 할 수 있다”며 “이 경우 미국산 감자 수입이 촉진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미 상무부는 유전자변형생물체(LMO) 감자 수입 개방도 비공식적으로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감자 농가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미국산 감자가 대량으로 들어올 경우 국내 농가의 가격 경쟁력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0년 전 귀농해 전라북도 남원시 씨감자 생산법인에서 근무했던 최태주 씨는 “수입 감자가 늘면 해태·농심 등 과자 업계의 국내산 감자 수요가 모두 수입산으로 옮겨갈 것”이라며 “국내에서 감자를 생산하는 소농들의 피해가 커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가공용뿐만 아니라 일반 감자의 가격 차도 커질 수밖에 없다. 이마트에서 판매 중인 미국산 러셋 감자 가격은 이날 기준 2㎏당 9980원으로 1만 810원이었던 국산 감자(대형)보다 이미 7.7% 싸게 판매되고 있다. 여기에 TRQ 저관세 물량이 확대되면 미국산 감자 가격은 더 내려갈 가능성이 크다.
실제 김인석 전남대 농업경제학과 교수팀은 지난달 말 ‘한국식품유통학회 2024 동계학술대회’에서 주제 발표를 통해 “미국산 감자가 올해부터 무관세로 수입될 경우 2039년 감자 수입량은 기존 전망치보다 27% 증가할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 경우 감자 농가의 경매를 통한 수취 가격은 6.1% 하락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새롭게 수입될 미국 11개 주산 감자 물량은 포함되지 않은 분석으로 실제 수입량 증가분은 이보다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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