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거래소가 비정량 지표 중심으로 상장 예비심사 기준을 높이면서 기업공개(IPO)를 자진 철회하는 기업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거래소는 상장 추진 기업이 신규 진행하는 사업의 안정성이나 사업 간 시너지, 경영진 비전 등 ‘질적 기준’을 중점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기업의 장기 경쟁력을 평가해 투자자를 보호하는 효과가 있는 반면 상장 허들이 높아져 IPO를 목표로 하는 신산업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7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상장 예비심사를 청구한 기업 중 에이모·영광와이케이엠씨·앰틱스바이오 등 5개 기업이 올 들어 IPO를 자진 철회했다. 이외에도 지난해 청구 기업을 통틀어 41곳이 예비심사를 철회해 통계 집계가 시작된 2000년 이래 최다 수준을 기록했다. 예비심사 자진 철회는 거래소 심사 과정에서 실질적인 거절 통보를 받는 기업들이 미승인 공시 전 택하는 선택지다. 심사 강도 이외에도 공모주 시황 영향을 받는 이전상장·재상장 및 공모철회·상장철회 사례는 제외한 수치다.
기업들은 거래소가 최근 강화한 ‘질적 심사’에 고전하는 모습이다. 지난해 예비심사를 청구한 에이스엔지니어링은 자체 개발한 에너지저장장치(ESS)용 특수 컨테이너 판매량이 크게 늘며 2019년 198억 원이었던 매출이 2023년 2959억 원으로 껑충 뛰었다. 이외 각종 양적 요건을 충족하면서 코스피 입성을 노렸지만 심사 단계에서 생산 외주처가 편중돼 있어 향후 사업 리스크가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에이스엔지니어링은 필요 시 외주처를 다변화할 수 있다는 설명을 제시했지만 심사 결과를 뒤바꾸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거래소는 투자자 보호와 증시 밸류업을 명목으로 질적 심사를 강화하고 있다. 기업이 매출·영업이익·기업 규모 등 양적 조건을 충족하더라도 △사업 지속성 △재무 안정성 △지배구조 △소송·분쟁 현황 등 여러 비정량 지표를 들여다보면서 추후 문제가 생길 여지가 없는지 정밀 검증하겠다는 취지다. 거래소 관계자는 “부실 기업이 상장하면 정책 당국이 지난해부터 추진하고 있는 밸류업에 문제가 생긴다”며 “투자자를 보호하는 것도 당연히 비정량 심사 강화의 주목적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심사 기관이 투자자 보호와 신규 상장을 통한 산업 육성 사이에서 균형추를 맞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기업 다수의 상장 및 자금 조달 길이 막히면 이들을 대상으로 한 모험자본 투자도 덩달아 줄어들어 신산업 생태계 전반의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윤건수 DSC인베스트먼트 대표는 “상장 시장이 지금처럼 위축되면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길이 막혀 투자 시장이 위축된다”며 “이는 곧바로 신산업 경쟁력 저하로 이어져 경제 생태계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증권사의 IPO 담당 임원은 “여러 심사 실패 사례가 쌓여도 정확한 기준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질적 심사를 강화하더라도 관련 기준을 사전에 구체적으로 알려 상장 추진 기업의 예측 가능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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