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것이 왔다. 수요가 급증했던 전기차가 안정적인 산업화를 위해 극복해야 할 캐즘에 직면해 있다. 기업의 투자 조정과 일부 창업 기업의 도산은 불가피하다.
캐즘은 신기술의 산업화 과정에서 당연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단지 여타 신산업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전기차 배터리 화재가 소비자들에게 공포감을 불어넣고 있다. 특히 언론이 과학적 근거 없이 배터리 화재 사건을 근 한 달간 다루면서 전기차의 위험성만 부각되고 있다.
지난달 벤츠 전기차 배터리 화재가 대형 피해를 유발하자 국내 언론들이 경쟁적으로 보도하면서 해외 유수 언론들도 한국발 기사를 내보냈다. 다양한 기관과 전문가들이 화재 원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확한 원인과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국내 일부 기관이 해외의 조사 분석 결과와는 달리 국내 보급 전기차의 화재 빈도가 내연기관차보다 높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자, 소비자들의 불안감은 가중되고 있다. 주요 완성차 업체들은 자사의 우수한 배터리관리시스템(BMS)이 화재 위험을 방지하고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하지만 배터리 업체들은 죄인인 양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소비자들은 우리 업체들이 제작한 3원계 배터리의 화재 위험성이 중국산 LFP(리튬·인산·철) 배터리보다 높은 것으로 인지하고 있다. 배터리 강국이라는 위상이 실추될까 우려된다.
이번 화재 사건 전부터 국내 배터리 업계는 전기차 수요 둔화에 따른 구조조정에 대비해왔다. 그동안 배터리 생산에 관심이 없었던 미국과 유럽이 배터리 생산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완성차 업체들도 자체 배터리 생산을 모색하고, 중국이 자국산 배터리의 성능 개선과 가격 인하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 전문가들이 우리나라의 전기차 배터리 경쟁력을 최고로 평가하자 정부는 지난해 배터리를 국가전략산업으로 지정해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그런데 화재 사건으로 인해 국내 배터리 산업의 위상이 급속히 실추되고 있다. 그 사이 중국산 배터리 업체들은 세계시장 지배력을 강화하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 우리 시장 진입을 모색하고 있다. 마치 국내 배터리 업체들이 사면초가에 빠진 형국이다. 정부의 규제, 소비자들의 불신, 위상 저하와 중국산 배터리의 시장 진입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이 안심할 수 있는 배터리의 개발과 양산은 매우 중요한 과제다. 그렇지만 자동차 산업 초기에 영국 정부의 붉은 깃발 정책과 같은 과도한 규제는 오히려 신산업의 육성을 저해할 수 있다. 당시 영국 정부는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마차를 이끌던 마부의 실업 방지와 보행자 안전을 위해 증기자동차의 속도를 거의 보행 속도 수준으로 제한하고 자동차 수십 m 앞에서 안전원이 붉은 깃발을 흔들어 자동차가 오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도록 했다. 그 결과 영국은 독일과 프랑스에 자동차 산업의 선두 자리를 내준 후 회복하지 못했다. 배터리·전기차 산업이 죽음의 계곡으로도 불리는 캐즘을 건너고 있는 상황에서 과도한 규제와 소비자 불안을 증폭시키는 언급은 자제해야 한다. 우리가 비교 우위를 확보한 배터리 산업을 나락으로 떨어뜨려 미래 모빌리티 산업 육성의 싹을 잘라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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