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 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그동안 대한상의 회장 자격으로 나선 기자 간담회에서는 SK 계열사에 대한 문제에 대체로 소극적인 답변을 내놓는 경우가 많았다. SK 회장이 아닌 재계 전체를 대표하는 경제단체 회장으로서 언론에 대응하는 게 옳다는 평소 소신 때문이다. 하지만 19일 대한상의 제주포럼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는 SK 경영은 물론 주력 상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 등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히 답하면서 SK는 물론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청사진을 소개했다.
최 회장은 우선 우리 정부가 반도체 보조금 지급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이 보조금 지급을 취소한다면 현지 공장 건립도 백지화할 수 있다고 밝힌 입장과도 맞물린다. 그는 “반도체 기술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전 세계가 반도체 공급 물량을 늘리기 위한 시설 투자 경쟁을 벌이고 있으며 팹(공장) 하나를 짓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20조 원에 이른다”면서 “기업이 과거처럼 ‘혼자 알아서 잘 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지경인 만큼 정부의 지원 프로그램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단순한 세액공제(세금 감면)나 2조 원 안팎으로 한정된 정책 대출로는 경쟁에서 이겨내기 어렵다는 의미다.
재계의 관심을 모은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합병에 대한 배경 설명도 내놓았다. 그는 “배터리 산업에서 캐즘(대중화 직전 일시적 수요 둔화)이 생긴 현실을 인정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이 산업을 관둘 수는 없다”며 “지금 주춤하는 모습은 있더라도 미래 성장성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그 시기까지 사업을 잘 돌아가게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두 회사의 합병 자체는 본질적으로 배터리 캐즘과 무관하게 추진된 것이라는 게 최 회장의 설명이다. 그는 “(SK 그룹의) 에너지 회사들이 다시 뭉치는 것은 인공지능(AI)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며 “AI 산업에 투입되는 막대한 에너지를 한 회사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에 시너지를 내기 위해 합병을 추진한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이날 앞서 열린 강연에서 2028년이 되면 AI 데이터 센터에 쓰이는 전력량이 지금보다 8배 이상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리 정부와 정치권을 대상으로는 세금 체계가 진화해야 한다는 쓴소리도 던졌다. 우리 세금 체계는 기업의 사정이나 여건을 따지지 않고 너무 일률적으로 설계돼 있어 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게 최 회장의 지적이다.
그는 “상속세 최고세율이 할증까지 얹어 60%인데 이것을 40%로 내린다고 해서 정답이 되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가령 어떤 기업이 ‘내가 경영을 잘해서 5년만 유예해주면 이후 주가를 올려서 주식의 일부를 팔아 내겠다’고 한다거나 ‘나는 경영 능력이 없으니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기고 물려받은 주식의 50%를 현금 대신 물납하겠다’고 한다면 이것이 나쁜 것이냐”고 지적했다. 기업의 상황에 따라 납부 방법과 시기 등을 유연하게 조절해줄 수 있어야 하는데 이 같은 조정 방안이 없다 보니 대다수의 기업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최 회장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처럼 우리 세금 체계도 디테일을 살려 진화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대한상의 차원에서 우리나라 AI 산업 발전을 위한 정책 건의도 내놓기로 했다. 그는 “한국이 AI 산업에서 공동화 또는 종속화될 우려가 있다”며 “AI 산업 내에서 스스로 AI를 이해하고 이 안에서 사고하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인 ‘AI 워리어(전사)’를 키워내기 위해 국가적인 인프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SK하이닉스에 변호사 출신 인재를 한 명 보내놓았는데 반도체 공부를 열심히 하더니 나중에는 웬만한 엔지니어보다 더 전문가가 되더라”며 “문·이과를 구분하지 말고 초등학교 때부터 AI 훈련을 받을 수 있게 씨를 뿌릴 수 있는 교육 시스템을 만들자”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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