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반도체 산업은 이제 시작이라고 봐야 합니다. 지금은 글로벌에서 엔비디아가 선도하고 있지만 조만간 가격과 성능, 전력 소모 정도 등 다양한 기준에 맞춰 시장이 세분화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우수한 제조 역량을 바탕으로 AI 반도체 설계 기술을 내재화해야 합니다.”
김신철 홍콩과기대 연구개발(R&D)센터 최고경영자(협리부교장)는 29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과 한국의 대응 전략’을 주제로 열린 ‘서울포럼 2024’ 세션 1 행사에서 “반도체 분야에서 새로운 성공 방정식을 만들어야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를 필두로 메모리칩 제조에서 최강국인 한국이 기술 패권의 핵심인 반도체 산업에서 주인공이 되려면 지금부터 ‘엔비디아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새롭게 떠오르는 AI 반도체 시장에서 승자가 되려면 갖춰야 할 덕목으로 그가 먼저 강조한 것은 다재다능함이다. ‘선택과 집중’ 방식으로 특정 분야에서만 실력을 키울 게 아니라 설계부터 시작해 전체 반도체 밸류체인에서 역량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 부교장은 “TSMC로 대표되는 대만은 이제 단순히 파운드리 제조만 잘하는 나라가 아니다”라며 “우리도 대만을 벤치마킹해 우수한 제조 역량을 레버리지로 반도체 기술 전반을 내재화해야 하는데 핵심은 팹리스가 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술 혁신을 위해서는 대학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 김 부교장의 진단이다. 그는 “지난해 한국에서 새로 나타난 22개의 유니콘 기업들을 살펴봤는데 핀테크·e커머스 외에 순수한 기술 기반 회사는 1~2개에 불과했다”며 “대학이 기술 개발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내는 선순환 구조가 한국에서 만들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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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기술이 성공한 기업으로 시장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세션에 패널리스트로 참석한 이정동 서울대 교수는 정부와 국회에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 교수는 “지금은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서 정부가 나서서 산업 정책을 노골적으로 추진하는 시대”라며 “해외에서는 정부와 의회, 산업계가 힘을 합쳐 뛰고 있는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돌이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으로 이공계 인력 수급이 정부가 신경 써야 할 문제다. 이 교수는 “최근 한국 사회에서 화두인 의대 증원은 국내 산업계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며 “엔지니어로 성장해야 할 학생들이 의대로 다 빠지면 기술 경쟁에는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국민적 차원에서 인식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첨단기술의 시장 활용 측면에서는 정부가 외교적인 역할을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미중으로 양분되고 있는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이 구분과 제약 없이 활약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치우치지 않는 외교로 판을 깔아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장웅성 산업통상자원부 R&D전략기획단장은 “미중 갈등에서 한국의 스탠스를 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은데 최근에 일론 머스크와 빌 게이츠 등 미국 산업계 인사들이 보이는 친중 행보에서 교훈을 삼아야 한다”며 “시장을 이길 수 있는 기술이 없다는 말을 유념해 ‘디커플링’에 갇혀서 우리 기업들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실제 미국과 중국은 두 개의 세계를 만든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로 탈동조화가 심화되는 상황이다. 수출에 특화된 한국 기업들 입장에서는 양국 시장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대응해야 하는 것이 큰 숙제로 남았다. 이와 관련해 이 교수는 “아메리칸 스탠더드와 차이니즈 스탠더드가 동시에 출현하고 있다”며 “두 세계의 가치사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기업은 물론 정부와 학계가 합을 맞춰 산업 정책 측면에서 대응하는 게 중요하다”고 진단했다.
기술 강국과의 협업 측면에서는 패권주의를 넘어 ‘협력적 기술 주권’에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우리가 강점을 갖고 있는 분야에서 선두를 공고히 해야 하겠지만 활용성을 높이기 위해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다는 자세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상목 SK텔레콤 AI엔터프라이즈 사업담당 부사장은 “기술 주권이라는 이름으로 고립을 자초하면 이류 기술들만 보유한 후진국으로 남을 우려가 크다”며 “기술 생태계 관점에서는 더 많은 숫자의 협력국을 만드는 게 중요한 만큼 미국과 중국은 물론 일본과 유럽·인도 등 어디와도 협업할 곳이 있다면 손을 잡는 유연한 태도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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