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개혁을 위한 시민대표단에 참여한 20대 가운데 절반 이상이 소득 보장률을 높이자는 방안을 선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이를 낳을 의사를 가진 이들이 많지 않은 까닭에 미래 세대의 부담은 남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반면 60대는 자식 세대를 걱정해 재정안정안을 선택한 이들이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23일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에 따르면 전날 발표된 시민대표단 설문 조사에서 18~29세(20대)의 53.2%가 ‘더 내고 더 받는’ 형태의 1안을 골랐다. 재정 안정을 중시하는 2안은 44.9%에 그쳤다. 1안은 보험료율을 13%로 올리면서 소득대체율도 현행 40%에서 50%로 인상하는 방안이다. 2안은 보험료율을 12%로 상향 조정하되 소득대체율은 유지(40%)하는 형태다. 앞서 연금개혁특위는 전체의 56%가 1안을 선택했다고 밝혔을 뿐 세부 연령대는 공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대표단이 미래 세대의 부담에 눈을 감았다는 분석이 나왔지만 실제로는 20대의 절반 이상이 천문학적인 기금 적자 확대에도 1안을 원했던 셈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2030세대 중심으로 결혼과 출산 의사를 가진 이들이 급감하면서 당장 나만 더 받으면 된다는 식의 인식이 퍼져 있다는 것이다. 여성가족부의 ‘2023년 가족실태조사’에 따르면 30대 미만 65.3%가 자녀 계획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어차피 아이를 안 낳을 건데 남의 자식이 더 부담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라며 “20대에게는 재정 안정성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잘 안 먹힌다. 당장 내가 더 받으면 그만”이라고 전했다.
연금 수급 개시 시점이 상대적으로 가까운 40~50대 역시 소득 보장 쪽에 기울었다. 40대는 66.5%, 50대는 66.6%가 1안을 선택했다.
반면 60세 이상에서는 1안을 고른 이들이 48.4%, 2안이 49.4%로 재정 안정을 원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정부의 또 다른 관계자는 “자식 세대를 걱정했기 때문 아니겠느냐”고 설명했다.
설문 결과는 지역별로도 차이가 있었다. 보수의 텃밭이라고 불리는 대구·경북은 72.3%, 진보 성향으로 평가받는 광주·전라·제주는 61.7%가 소득 보장을 택했다. 하지만 대구·경북과 함께 보수 성향으로 불리는 부산·울산·경남은 재정 안정(59.3%)이 더 많았다. 미래 세대가 포함된 사업장 가입자와 지역 가입자는 각각 59.9%, 70.7%가 1안을 선호했다.
정부 안팎에서는 연금 개혁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저출생·비혼 현상과 맞물려 복잡해지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런 식이라면 제대로 된 개혁이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날도 소득보장론 측은 대표단 설문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보장성 강화를 핵심으로 하는 연금 개혁 추진을 요구했다. 연금 보장성 강화를 주장해온 공적연금국민행동은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와 국회는 시민대표단의 결정을 받아들이라”며 “노후 소득 보장은 국민연금을 중심으로 설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직 정부 고위 관계자는 “토론 과정에서 소득대체율 인상은 지금 젊은 세대에도 혜택이 된다는 주장이 먹혀든 것 같다”며 “이는 재정건전성 악화와 세금 투입 가능성은 빼놓은 포퓰리즘적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국회 논의 과정에서 재정 안정을 강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재정 안정의 중요성을 고려해 2안을 선택한 대표단 42.7%의 의사도 귀중하다”며 “57.9%가 국민연금 고갈 시점을 2075년 이후로 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런 설문 결과도) 국회 논의 과정에서 고려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금개혁특위 국민의힘 간사를 맡고 있는 유경준 의원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1안은 현행 제도 개선이 아닌 개악”이라며 “공론화 결과에 아쉬운 점이 많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미래 세대에게 낸 만큼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방식을 고민해야 했다”며 “국회 연금개혁특위 논의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보완할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이강구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미래 세대가 얼마나 큰 부담을 지게 될지, 왜 그것을 미래 세대에게 떠넘기면 안 되는지 (재정안정론 측이) 잘 설명하지 못한 것 같다”며 “그런 인식이 없는 상태에서 현재 세대인 대표단은 보장을 더 받는 안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박명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더 받으면서 재정이 더 길게 가는 방법은 없다. 공짜 점심은 없기 때문”이라며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으니 소득 보장을 택하면서도 기금 고갈 시점은 늘려 달라는 모순적인 설문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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