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005930) 회장이 3년 2개월 간 발목을 잡았던 부당합병·회계부정 1심 재판을 마무리했다. 그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대해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에 선제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두 회사 합병도 그런 흐름 속에서 추진됐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검찰이 ‘공짜 경영권 승계’라고 비판한 두 회사 합병은 사익 추구를 위한 비위가 아닌, 위태로운 글로벌 경영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이 회장에게 징역 5년, 벌금 5억 원을 각각 구형하면서 재판부에 중형 선고를 요청했다. 재판 종결과 함께 사법 리스크 해소를 기대했던 삼성전자는 불확실성이 오히려 더 커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회사 존속 위한 결정…1등 기업 기준 못미쳐 죄송”
이 회장은 이 회장은 17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2부(박정제·지귀연·박정길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 등의 결심 공판에서 최후 변론을 통해 이 같이 전했다. 그는 가장 먼저 “대한민국 1등 기업, 글로벌 기업에 걸맞게 더 높고 엄격한 기준에 임했어야 하는데 많이 부족했던 것 같다.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이 회장은 핵심 쟁점이었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결정한 이유에 대해 “회사 존속과 성장을 지켜내고 회사가 잘 돼 국민 여러분의 사랑을 받는 것이 목표였다”고 설명했다.
이 회장은 글로벌 경제 위기 상황 속에서 한국과 삼성이 처한 상황을 진단했다. 그는 “지금 세계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지정학적 리스크가 발생하고 있고 우리나라는 그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며 “글로벌 공급망이 광범위하게 재편되고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AI) 기술이 반도체는 물론 전 세계 산업에 영향을 미치는 등 상상보다 빠른 속도로 기술 혁신이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현재 벌어지는 이러한 일들은 사전에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래 전부터 사업의 선택과 직접 신사업·신기술 투자,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모자란 부분을 보완하고 지배구조의 투명화를 통해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에 선제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두 회사 합병이 세밀한 경영 전략에 따른 결과물이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경영권 승계를 위해 주주 가치를 훼손했다는 검찰의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이 회장은 “두 회사의 합병과 관련해서 저 개인의 이익을 염두에 둔 적이 없다”며 “더욱이 제 지분을 늘리기 위해 다른 주주 분들께 피해를 입힌다는 생각은 맹세코 상상조차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덧붙여 “외국 경영자, 주요 주주들, 투자기관 관계자들과 나눈 대화 내용이 재판 과정에서 전혀 다른 의미로 오해되는 것을 보면서 너무 안타깝고 허무하기까지 했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이 회장은 “합병은 두 회사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고 지배구조를 투명화·단순화하라는 사회 전반의 요구에도 부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이 회장은 삼성 경영을 통한 사회적 책임에 대한 생각도 밝혔다. 그는 “삼성이 세계 수준의 일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삼성에 몸담은 수많은 임직원의 헌신과 희생 덕분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며 “저에게는 기업가로서 지속적으로 회사의 이익을 창출하고 미래를 책임질 젊은 인재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를 제공해야 할 기본적 책무가 있다”고 했다. 이어 “(조부인) 이병철 회장님이 창업하시고 (부친인) 이건희 회장님이 글로벌 기업으로 키운 삼성을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시켜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을 늘 가슴에 새기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글로벌 초일류기업과 경쟁·협업하면서 친환경과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지배구조를 더욱 선진화 시키는 경영, 소액주주에 대한 존중, 성숙한 노사관계 정착 등 새로운 사명도 주어져 있다”고 했다.
이 회장은 재판부를 향해 “이러한 책무를 다하기 위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붓겠다”며 “부디 저의 모든 역량을 온전히 앞으로 나아가는 데만 집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기를 부탁드린다”고 호소했다.
함께 재판을 받는 다른 경영진들에 대한 선처 요청도 잊지 않았다. 이 회장은 “오랜 기간 재판을 받으면서 제 옆에 계신 피고인들게 늘 미안하고 송구스럽다”며 “이 사건에 대해 법의 엄격한 잣대로 책임을 물어야 할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회사를 위해 헌신해 온 다른 피고인들은 선처해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제가 40대 중반이던 2014년 아버지께서 병으로 쓰러지신 뒤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세 번의 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심문)와 1년 6개월에 걸친 수감생활도 겪었다. 어느덧 저도 이제 50대 중반이 됐다”며 개인적 소회를 드러내기도 했다.
경영 족쇄 된 3년 재판…사법 리스크는 현재 진행형
3년 2개월의 재판 끝에 1심 재판이 종결됐지만 삼성전자 내부에서는 불안한 기류가 전해졌다. 검찰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게 징역 5년, 벌금 5억 원을 각각 구형하면서 사법 리스크 해소를 기대했던 삼성전자 내부에서는 무거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동안 재판에 거의 매주 참석하면서 경영 활동에 발이 묶였던 이 회장이 재판 종결을 계기로 다시 적극적인 행보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컸다. 하지만 예상보다 중한 구형으로 인해 이르면 내년 초 예정된 선고까지 불확실성이 계속 이어지게 됐다는 반응이 나왔다.
재계에서는 이날 오전 이 회장에 대한 검찰의 구형 소식이 전해지자 “예상보다 과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재판 결과와 관계없이 이 회장에 대한 사법 리스크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으면서 경영 위기 상황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컸다. 만에 하나 실형이 선고되면 미래 준비에 매진해야 할 골든타임을 놓치고 삼성 전체가 표류할 수 있다. 항소심·상고심 등까지 고려하면 재판에 대한 부담이 수년간 장기화하게 된다는 점도 고민거리다.
실제 미중 갈등, 고금리·고물가·고환율 등 3고(高) 지속, 반도체 업황 부진 장기화 등 삼성을 둘러싼 경영 환경은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삼성의 최종 의사결정권을 가진 이 회장은 재판과 이에 따른 여론의 부담 등을 이유로 경영 최전선에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기 어려웠다. 지난해 광복절 특별 사면으로 복권됐지만 거의 매주 재판에 출석해야 하다 보니 최대 강점인 글로벌 네트워크를 가동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미래 사업 방향을 진두지휘해야 할 수장의 집중력이 재판으로 분산된 사이 삼성 관계사들의 행보는 갈지자를 걷고 있다. 삼성전자는 3개 분기 연속 반도체(DS) 부문 조(兆) 단위 적자를 기록하는 등 실적 부진에 시름하고 있다. 다른 관계사들도 대규모 신사업 투자 등에서 한 발짝 빠른 판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
재계에서는 공룡이 된 삼성이 각 관계사들 간 시너지를 이루며 글로벌 시장에서 대응할 수 있도록 그룹 컨트롤타워를 재건하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과제라고 조언하고 있다.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삼성이 올해 말에는 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을 부활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검찰 구형이 예상 외로 가혹해 내년 선고까지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 이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같은 위기 상황 속에서도 당분간 이 회장의 준법 경영 행보는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이 회장은 여론의 신뢰 확보를 경영 행보 본격화에 앞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보고 준법 경영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재판으로 해당 사건 자체에 대한 판단은 마무리되겠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삼성을 둘러싼 사회적인 믿음을 확실하게 다지고 가겠다는 판단이다.
이 회장이 2020년 삼성전자 등 7개 관계사의 준법 의무 이행을 점검하기 위해 설치한 준법감시위원회가 대표적이다. 여기에 지난달에는 삼성SDI와 삼성SDS에서 선임 사외이사 제도를 도입해 이사회 중심의 책임 경영에 더욱 힘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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