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소프트웨어 회사를 만들겠단 생각으로 루닛(328130)을 창업하게 됐습니다. ‘제조업 분야에선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글로벌 기업이 있는데 소프트웨어 분야에선 왜 한국이 치고 나가지 못할까’라는 문제 의식을 갖고 있었어요. ‘왜 그럴까?’ 생각했고 대학원에서 훌륭한 동료와 지도 교수님을 보며 개인의 역량 문제는 아니라고 결론 지었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고 마음만 먹는다면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런 고민을 가볍게 듣기보다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들과 루닛의 여정을 함께 시작하게 됐죠.”
백승욱(사진) 루닛 이사회 의장은 최근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창업 배경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올해로 창립 10주년을 맞은 루닛은 의료 인공지능(AI) 전문 기업으로 글로벌 시장의 문을 적극적으로 두들기며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AI를 활용한 진단부터 치료제가 환자에게 얼마나 효과적인지 찾는 AI 바이오마커, 여기에 더해 신약 개발까지 나아가 인류의 암 정복이란 꿈을 이뤄내겠다는 야심찬 포부도 밝혔다. 루닛의 AI 기술력이 허황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듯 미국의 암 정복 프로젝트 ‘캔서문샷’에 합류해 유수의 다국적 제약사들과도 협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치만 루닛의 첫 도전은 의료 분야가 아니었다. 백 의장은 소프트웨어 리딩 기업을 만들자는 일념으로 힙합동아리에서 만난 동료 5명을 끌어모았다. 모두 창업과 ‘딥러닝’ 등의 기술에 관심 많은 카이스트 공대생이었다. 그렇게 2013년 루닛의 전신인 클디를 설립했다. 클디는 고객에게 가장 어울리는 옷을 찾아주는 AI 모델을 내놓았다. 백 의장은 “당시엔 딥러닝 시대가 온다는 걸 알기만 하더라도 앞서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딥러닝으로 뭐라도 하고 싶었다”며 “패션 기업들의 인수합병(M&A) 소식을 접하면서 데이터에 대한 접근성도 좋고 재밌어 보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순진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 사업은 오래가지 못했다. 개인의 취향이 중요한 패션 분야를 AI의 정확도를 내세워 접근한 게 패착이었다. 정답이 없는 분야에서 답을 찾으려 한 것이다. 그런 그는 다른 사업 모델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실제 투자를 받다 보니 무엇이 됐든 고객의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백 의장은 “산업용 AI도 고려했고 여러 분야를 봤지만 의료 분야가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의학적 지식은 공식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 임상 현장에서 관측된 데이터를 분석한 지식”이라며 “데이터 싸움인 만큼 의료 영역에서 풀려고 하는 문제에 AI가 적용될 수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그렇게 의료 AI 소프트웨어 기업인 루닛은 2015년 탄생한다. 다만 처음부터 루닛이 성장 가도를 달린 것은 아니다. 의료 산업은 대표적인 규제 산업이고 의료 데이터 확보 등의 문제도 걸림돌이 됐다. 특히 초기 창업자들은 의학 분야에 인용수가 많은 논문을 갖고 있지도 의료 분야에 대한 배경 지식을 보유한 팀도 아니었다. 도전 정신과 열정만으로 의료 산업이란 산을 정복하기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시행착오도 많았다고 한다. 열심히 뛰쳐나가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경우도 숱하게 겪었다.
◇"잘 몰랐기 때문에 도전 가능"…"부딪치다 보니 나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식하니까 용감하게 부딪칠 수 있었어요. 전문가들은 허들이 검증 되기 전까지 다음 스텝을 못 밟거든요. 잘 모르니까 빨리 빨리 진행할 수 있었던 점도 있었습니다.”
백 의장은 초심자의 행운도 겪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전문가들은 누구보다 각자의 영역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신중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깊이 고민하다 보면 했어야 할 일도 놓칠 수 있다. 그는 “상황이 바뀌어 갈 때마다 곧장 뛰쳐나가다 보면 뒤늦게 ‘아 이게 문제였구나’를 깨달을 때도 있었지만 그렇게 나아가다 보니 자연스레 해결된 문제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루닛은 GE헬스케어 등 유수의 글로벌 기업과 협업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병원과도 접점을 넓혀가고 있다. 모두 직접 부딪친 결과다. 백 의장은 루닛 설립 이후 구진모 서울대병원 교수의 영상의학회 세션에 찾아갔다. 구 교수는 영상의학 최고 권위자로 과거부터 진단 보조 제품을 만들어온 AI 영상 진단 분야의 선구자다. 백 의장은 맨 앞 줄에 앉았고 발표를 마치고 내려온 구 교수에게 사업 모델을 설명하며 도움을 구했다. 백 의장은 “구 교수가 저희의 사업 모델을 좋게 평가해주셨다”며 “이후 데이터 확보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셨고 워낙 영향력 있는 분이어서 여러 전문가들을 소개해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해외 병원 네트워크는 말 그대로 바닥부터 쌓아 올렸다. 국제적인 영상의학회에서 전문가들을 찾아갔고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왔다. 이들이 또 다른 전문가들을 소개해주면서 점차 많은 사람들을 알아갈 수 있었다. 이런 시간들이 축적되다보니 누가 어느 영역의 전문가인지, 영향력은 어느 정도인지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머릿속엔 글로벌 시장의 지형이 점차 그려졌다. 해외 진출에 속도가 붙기 시작한 순간이다.
◇글로벌 학회에서 1위…전 세계에 루닛 이름 알려
백 의장은 창업 후 최고의 순간으로 2016년을 꼽았다. 루닛은 2016년 의료 AI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국제의료영상처리학회(MICCAI)가 주관한 ‘의료 AI 경진대회’에서 1위를 차지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IBM을 제치며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AI 유방암 진단대회 CAMELYON17에선 하버드, MIT 등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백 의장은 “그간 AI의 시대가 온다면서 투자자를 설득했다. 그럼에도 결국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게 중요했다”며 “미래를 팔아 펀딩을 받아오다가 처음으로 제 주장을 입증 했던 순간”이라고 회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최고의 순간과 맞물려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찾아온다. 백 의장은 이 무렵 미국 진출을 적극적으로 타진하고 있었다. 끊임 없이 노력했지만 투자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제품은 훌륭하다고 생각했는데 실패가 누적되다 보니 고심은 깊어졌다. 엔지니어인 백 의장은 기술 개발에 드라이브를 걸 순 있었지만 주요 고객인 의사를 설득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백 의장은 “내부적으로 잘못된 것은 없는데도 불구하고 최고경영자(CEO)가 팀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런 그는 2018년 대표직을 내려 놓게 된다. 가정의학과 전문의 출신 서범석 당시 루닛 의학총괄이사가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모든 부분을 갖고 있다고 문득 느꼈다고 한다. 백 의장은 카이스트 재학 시절부터 알고 지낸 서 이사에게 대표직을 제안했고 서 이사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백 의장은 “대표 교체 이후 본격적으로 성장 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지금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서 대표를 선택할 것”이라며 “제 자존심은 고려 대상이 절대 아니었고 고려 대상은 오직 루닛의 성공 뿐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젠 의장으로서 미래 설계…"암을 정복한 회사로 평가받고 싶다"
백 의장은 암을 정복한 시대를 상상하며 밑그림을 그려나가고 있다. 그는 암을 조기에 발견해 생존율을 올리는 동시에 치료 비용까지 줄일 수 있는 시스템을 앞으로 10년 동안 준비해나가겠다고 역설했다. 단순히 암을 진단하고 치료제를 처방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얘기다. 백 의장은 “암을 얘기할 때 주로 생존율 위주로 얘기하는데 더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보기 위해선 암 치료에 드는 비용이 내려가야 한다”며 “결국 암의 정복은 비용의 문제고 비용을 낮추자는 쪽으로 루닛의 방향성을 설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AI가 신약 개발 비용을 낮추는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 백 의장의 생각이다. 일반적으로 기술이 발전하면 개발 비용은 내려가기 마련이지만 신약 개발 분야는 예외였다. 백 의장은 “AI가 후보 물질 발굴에 적용되면 초기 비용을 낮출 수 있다. 임상 과정에서도 바이오마커에 AI가 적용되면 신약 개발 전반의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이어 “암이 발생할 가능성을 예측하는 등의 방식으로 조기에 암을 발견하면 암 치료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면서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의료 빅데이터 플랫폼 구축"…2033년 10조 원 매출 달성 도전
“처음엔 우리가 의료 사업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1년이 지나고 보면 의대 교수님들과 프로젝트를 얘기하고 있었고, 다음해엔 논문을 냈어요. 그 다음해엔 학회에서 비즈니스 파트너와 초기 대화를 나누고 있었구요. 매년 상상할 수 없는 걸 이뤄내고 있다는 느낌이 있는데 이 기쁨이 정말 큰 것 같아요. 끊임 없이 자기 객관화를 하면서 안주하지 않기 위해 노력 하고 있습니다.”
루닛 설립 이후 10년을 달려온 백 의장은 인터뷰 내내 담담한 자세로 임했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칠 수도 있지만 다음 10년에 대한 계획에 대해 말할 땐 담담한 태도에서 즐거움과 자신감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루닛의 모든 구성원이 성장의 기쁨을 누리며 함께 나아가겠다”며 이처럼 말했다.
올해로 창립 10주년을 맞은 루닛은 다음 10년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연 매출 10조 원과 영업이익 5조 원을 달성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도 밝혔다. 국내 모든 제약·바이오 기업을 통틀어도 달성한 적 없는 숫자다. 시장에선 루닛의 계획이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라고 평가하듯 2000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 소식에도 주가는 상승 흐름을 보였다.
AI 암 진단 솔루션을 넘어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낙점한 AI 기반 ‘의료 빅데이터 플랫폼’ 구축은 백 의장이 그려낸 중장기 계획 중 하나다. 전 세계 검진센터, 지역거점 병원, 임상시험 기관, 암센터 등에서 암과 관련 다양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고도화된 AI 학습 모델을 통해 암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정밀 분석하겠다는 구상이다. 데이터 플랫폼을 바탕으로 새로운 진단 사업 모델도 개발한다. 모든 암을 검진할 수 있는 ‘전신 MRI’를 개발해 발병률이 높은 5대 암 뿐만 아니라 모든 암을 조기에 발견하겠다는 설명이다.
루닛의 AI 바이오마커 플랫폼 ‘루닛 스코프’는 더욱 고도화 한다. 유전체학, 미생물학 등 질병 연구를 위한 다양한 분석과 접근법을 뜻하는 멀티오믹스 방식을 적용해 환자에게 가장 적합한 암 치료를 위한 멀티오믹스 바이오마커를 개발할 예정이다. 백 의장은 “피검사 결과, 가족력 등 다양한 요소들을 모아 더욱 정확하게 암을 분석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같은 사업 모델의 기저엔 비용 절감 어젠다가 자리 잡고 있다. 비용을 낮춰야만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소수의 사람만 혜택을 봐선 암을 정복할 수 없단 얘기다. 현재 AI는 후보 물질을 발굴하는데 주로 쓰인다. AI가 더욱 고도화돼 신약 개발 기간이 줄어든다면, 연구개발(R&D) 비용을 줄일 수 있어 약가가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이를 루닛이 해내겠다는 의지도 피력했다. 백 의장은 “효과 있는 약을 낮은 비용으로 시장에 출시할 수 있도록 하고 더 많은 환자들이 최적의 치료 받을 수 있게 하려면 AI 데이터 플랫폼이 굉장히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루닛 스코프를 기반으로 신약 후보 물질을 발굴하면서 신약 개발도 나선다. 유망 후보 물질에 루닛 스코프를 적용해 긍정적 결과가 도출되면 기술 이전을 추진한다. 이를 직접 개발해 상업화하거나 대형 제약사에 재차 기술이전 하는 방식으로 사업 모델을 구체화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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