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을 절대 안 하다 코로나 때 위스키를 접하고 달라졌어요. 이제는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는 혼자만의 시간이 생겼죠. 고도주만의 매력이 있어서 처음부터 위스키를 찾았어요."
술잔을 몇 바퀴 돌린 뒤 능숙하게 시향(試香)하는 30대 직장인 A씨의 손놀림이 남달랐다. 그는 금요일 근무가 끝나자마자 회식 자리도 마다하고 홀로 이곳을 찾았다. 이날 열린 위스키 시음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20일 밤 롯데마트 보틀벙커 서울역점 한 켠에는 하얀 커튼을 친 아늑한 공간이 마련됐다. 따뜻한 조명 아래 잔잔한 음악도 흘러나왔다. 카메라를 메고 온 동호인들이 렌즈를 갈아끼워 가며 한정판 위스키의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대형마트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
한국 브라운포맨은 이번 시음회를 위해 싱글몰트 스카치 위스키 ‘글렌드로낙’의 연산별 제품을 내놨다. 12·15·18·21년산의 기본 라인업에 캐스크 스트렝스, 1994(캐스크 보틀링)등 한정판까지 동원했다. 글렌드로낙은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증류소 중 하나다. 200년 가까이 전통 방식을 고수해 명성을 얻었다.
시음회장 내부엔 A씨 외에도 스무 명 가량의 직장인들이 몰렸다. 참석 기회는 10만원 이상을 구매한 사람들에 한해 선착순으로 주어졌다. 그마저도 지난 5일 참가 신청을 받은 이래 하루 만에 매진됐다. 이날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문의가 빗발쳤다고 주최 측은 전했다.
그만큼 현장의 분위기는 조용하면서도 열기가 가득했다. 참가자들은 저마다 테이스팅 노트에 감상평을 메모하고 의견을 나눴다. 희귀한 제품을 구했던 자신만의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른 참가자 B씨는 외국인 수집가와 거래를 잡아놓고 프랑스를 여행하는 지인을 약속 장소로 보냈다. 단 위스키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부탁하는 게 핵심이다. 그는 “스스로 욕심이 생기면 제 부탁을 안 들어 줄 것"이라며 웃었다.
위스키 열풍은 수치로도 드러난다. 올해 1~9월의 수입량은 2만4968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6% 늘어난 수치다. 이 추세라면 연말까지 수입량이 어렵잖게 지난해를 뛰어넘어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할 전망이다.
유통업계는 최근 위스키에 공을 들이고 있다. 와인 인기가 한풀 꺾였단 판단에서다. 프리미엄 위스키는 그간 백화점과 호텔, 면세점 등 고급 채널을 중심으로 유통됐지만 최근에는 대형마트와 편의점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저마다 경쟁적으로 전문샵과 행사를 내놓고 있다. 고급화 경향이 뚜렷하다.
대형마트도 고급 주류업체 입장에서 매력적인 채널로 부상했다. 정슬기 롯데마트 보틀벙커팀 MD(상품기획자)는 "주류업체에서 보틀벙커를 마트가 아닌 리쿼 전문샵으로 봐주고 있다”며 “롯데마트에 원래는 공급하지 않던 술을 배정해주기도 한다"고 귀뜸했다.
롯데마트는 최근 리뉴얼한 ‘제타플렉스’ 점포마다 주류 전문매장 보틀벙커를 두며 과감하게 힘을 싣고 있다. 서울역점에서 취급하는 구색 수는 리뉴얼 이전 대비 다섯 배로 늘렸다. 롯데마트 관계자는 "(서울역점 리뉴얼 이후) 양주와 와인 매출이 크게 올랐다"며 "인근은 소득 수준이 높은 상권인 데다 접근성이 뛰어나고 오피스 고객이 많다"고 설명했다.
시음회는 잠재적 VIP고객을 만나는 수단 중 하나다. 위스키 인기를 이어나가는 데도 효과적이다. 롯데마트는 애호가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은 러셀 마스터 디스틸러의 클래스를 향후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병당 500만원 상당의 프리미엄 제품 시음회도 열기로 했다. 정 MD는 “보틀벙커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클래스를 기획하기 위해 고심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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