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한국은행 총재 가운데 지금처럼 대중에게 주목받았던 적이 있었을까요.”
이제 나흘 뒤면 취임 1년을 맞는 이창용 한은 총재에 대한 세간의 공통된 평가 중 하나다. 지난해 4월 8년 만의 외부 출신 총재로 통화정책의 키를 잡게 된 그는 시장과의 소통을 강조하며 특유의 직설 화법으로 숱한 화제를 몰고 다녔다. 전임 총재들의 아리송한 화법과 달리 그는 “상투 잡을 위험이 있다” “부동산 불패 신화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등의 말로 ‘서학개미’와 ‘영끌족’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던졌다.
네티즌들은 이 총재에게 ‘창용신(神)’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통화정책에 있어서도 금통위원들의 금리 전망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일명 ‘K점도표’를 도입해 예측 가능성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만큼 신중하고 절제된 언어를 고집해온 역대 총재들과는 분명 다른 행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나온 일부 정제되지 않은 발언이 시장의 혼란을 부추기는 빌미를 제공한 적도 있다.
숨 가쁘게 달려온 이 총재의 지난 1년에 대해 아직 긍정 평가가 앞서지만 남은 임기 3년은 결코 녹록지 않은 시간이 될 것이다. 그가 취임사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 경제는 도전을 이겨내고 한 단계 도약하느냐, 아니면 장기 저성장에 빠지느냐의 중대 갈림길에 있다. 고삐 풀린 물가를 잡기 위해 가파르게 금리를 올린 탓에 물가는 진정세로 접어들고 있지만 가계와 기업의 이자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면서 소비와 투자 부진으로 이어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든든한 버팀목이던 반도체 수출마저 꺾이면서 국가의 경제 체력을 나타내는 경상수지는 11년 만에 두 달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여기에 미국발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는 금융 부문의 위기를 키우는 또 다른 악재다.
하지만 이 총재가 맞닥뜨려야 할 진짜 위기는 이제부터다. 그동안 억눌린 공공요금 인상이 예고된 가운데 내년 총선을 앞둔 여야의 선심성 돈 풀기 경쟁은 또다시 물가를 자극할 수 있다. 이 총재가 우려를 나타냈듯 시중은행의 대출금리 인하를 압박하는 금융 당국의 관치 논란도 통화정책의 효과를 반감시키고 있다. 연내 금리 인하 가능성에 대해 이 총재는 시기상조라며 선을 긋고 있지만 선거가 다가올수록 정부 여당의 압박이 거세질 게 분명하다. 외풍으로부터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지켜내면서 물가와 금융 안정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하는 난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이 총재는 지난해 취임사에서 “훗날 한국은행이 한국 경제를 전환점에서 올바른 길로 이끌었다는 자부심을 갖도록 일하자”는 말로 끝맺었다. 훗날 취임사의 약속을 지킨 총재로 기억될지는 남은 임기 3년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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