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내비게이션 기술의 토대가 됐고 1970~1980년대의 2차전지 기초과학이 전기차 시대로 이어지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기초과학을 본격 시작한 게 10년 조금 넘었는데 여전히 기초연구 현장에서 애로가 많습니다. 외국인 석학 연구자를 붙잡거나 유치하기에도 여건이 만만치 않고요.”
노도영 기초과학연구원(IBS) 원장은 27일 서울경제와 인터뷰를 갖고 “연구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것과 해줄 수 있는 것 사이의 격차가 너무 커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다”며 이같이 말했다. 광주과학기술원(GIST) 물리광과학과 교수인 기초연구자로서 IBS 연구자에게 최상의 연구 환경을 제공하고 싶은데 여러 제약들이 있다는 것이다. 노 원장은 “기초과학 책임자로서 규제의 틀을 좀 더 격상시키는 게 책무”라며 “하지만 권한이 부족해 혁신 과정에서 난관이 많은데 타협하다 보면 심적 부담이 크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어 “기초과학 연구는 당장 국가 산업 발전과 연결되지는 않지만 중장기적으로 산업과 생활의 질적 고도화에 기여하게 된다”며 퍼스트무버(선도자) 도약을 위한 기초과학 육성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먼저 기초과학을 튼튼히 해야 영향력이 큰 응용·개발 연구도 할 수 있는데.
△당연하다. 속도와 중력에 따라 시간이 달라진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위성항법시스템(GPS)의 오차 보정에 쓰인다. 올해 첫 적혈구 빈혈증 치료제가 나올 것으로 기대되는 유전자가위(크리스퍼) 기술의 경우 1980년대 세균에서 특이한 DNA 염기서열이 반복되는 현상을 발견한 뒤 시작됐다. 코로나19 mRNA 백신도 1961년 mRNA의 존재를 첫 규명한 뒤 팬데믹 국면에서 전달물질인 NLP(리피드 나노 파티클) 기술이 가미해 조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mRNA 활용 연구는 말라리아 등 다양한 백신 외에도 암, 독감, AIDS 정복을 위해서도 이뤄지고 있다.
-기초과학 연구의 산실인 IBS를 소개해달라.
△2011년 11월 설립돼 대전 본원에 10개 연구단, 한국과학기술원(KAIST), 포항공대(포스텍), 울산과학기술원(UNIST) 등 과학기술특성화대에 12개 연구단, 주요 대학에 외부 연구단 9개 등 총 31개 연구단이 있다. 또 코로나19 팬데믹 국면에서 만든 한국바이러스기초연구소와 현재 건설 중인 중이온가속기연구소가 있다. 수리과학·물리·화학·생명과학·지구과학 분야의 세계적 과학자를 연구단장으로 선정해 자체 팀을 꾸리도록 한다. 단장은 권한이 큰 대신 휴직할 수 없고 연구년 연수도 갈 수 없다. 잠재력이 큰 젊은 연구자를 부연구단장, 그룹리더 등으로 육성하고 젊은 단장들도 늘릴 것이다.
-기존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원에 비해 완전히 차별화되는데.
△그렇다. 대학·출연연 연구자들은 제안서 쓰고 연구비를 따는 데 중점을 둔다. 그다음은 임팩트팩터(IF·피인용지수) 높은 논문을 쓴다. 이러다 보니 정작 중요한 연구는 세 번째가 돼 본말이 전도된다. IBS의 목표는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기초과학 연구를 장기적으로 안정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대형 인프라를 갖춰 자연·우주·생명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해 집단 융합연구를 한다. 외국인 연구자도 30%가량 된다. 학연교수와 초빙방문연구원 확대도 추진한다.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와 성격이 비슷하다.
-미국의 유명 교수들도 연구비 수주에 시간을 쏟아야 하는 상황인데 IBS 연구단은 상당히 유리한 환경에 있는 것 같다.
△정부나 연구재단 등 공공기관, 기업에서 연구 과제를 수주하지 않아도 된다. 연구에만 전념하라는 뜻이다. 연구단은 첫 평가도 5년 뒤 컨설팅식 평가와 이후 3년마다 심층평가를 받아 연장할 수 있다. 해외 석학 평가단을 중심으로 새로운 발견과 연구 영향력을 중심으로 질적으로 평가한다.
-그래서인지 여러 연구단에서 좋은 논문을 썼다고 홍보하는 경우가 많더라.
△저는 논문 쓰는 시간도 아까우니 영향력 있는 연구에 집중하라고 한다. 논문을 쓰려면 그림을 고치고 에디터와 싸우기도 해야 한다. 하지만 저명한 저널에 연구성과를 게재하는 것은 연구자의 꿈이다. 연구단장 입장에서는 실험 데이터를 내는 것보다 잠시 중단하더라도 네이처 등에 제출할 논문을 수정하는 것을 우선시한다. 논문도 중요하지만 과학적 영향력이 더 절실하다. RNA연구단의 김빛내리 서울대 교수도 처음으로 코로나19 유전자 지도를 완성한 논문을 냈는데 이는 많은 기초연구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응용·개발 연구 측면에서도 쓰였을 것이다.
-그런데 IBS가 현실적으로 예산 등 여러 측면에서 어려운 상황에 있는 것으로 안다.
△IBS 출범 당시에는 연구단마다 연 100억 원가량 지원했지만 그 뒤 연구단이 많이 늘면서 지원액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연구 장비 등 물가도 많이 올랐지만 올해는 연구단마다 평균 55억여 원을 배정했다. IBS 총예산은 올해 2740억 원 정도로 정체 상태다. 지난해는 덩치가 조금 커졌는데 중이온가속기 운용 예산이 100억 원 이상 들어오고 바이러스연구소 예산도 포함됐기 때문이다. 통계의 착시인데 정작 IBS의 중추인 연구단 예산은 줄고 있어 스트레스가 크고 연구자들에게 미안하다.
-외국인 연구단장들이 한국에 계속 머무르려고 하는가. 또 신규 단장을 유치할 때 조건이 맞지 않아 실패한 사례도 있던데.
△외국인 연구자 총 165명 중 5명이 연구단장이다. 이 가운데 두 젊은 단장은 꽤 재미있어 하고 능력도 대단하다. 부산대에 있는 기후물리연구단의 악셀 팀머만 단장에게 IBS 자체 슈퍼컴퓨터의 80~90%를 쓰게 해줬다. 세계적으로 기후 시뮬레이션을 잘하는데 박사급과 박사후연구원 20~30명 등 총 60여 명이 대학 전체에 파급효과를 미친다. 일반 지방대에서 IBS 연구단은 부산대가 유일한데 한 군데는 더 넓혔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는데 그게 잘 안 된다. 이화여대에 있는 양자나노과학연구단의 안드레아스 하인리히 단장도 연구를 확장하고 있다. UNIST의 경우 3개 연구단 중 두 곳이 외국인 단장인데 학교의 위상 제고에 많이 기여하고 있다. 물론 외국인이 한국에서 연구하는 게 쉽지 않다. 규제 혁신과 행정 효율화를 했다고 해도 여전히 장벽이 있기 때문이다. 바이오 분자구조 분야의 한국계 미국 석학은 200억~300억 원 규모의 장비와 실험실 구축을 요청해 연구단장으로 초빙하지 못했다.
-장관급인 IBS 원장 임기는 5년으로 차관급인 출연연 원장(3년)보다는 긴데 어떤가.
△출연연 원장도 그렇지만 혁신하기가 힘든 구조다. 각종 법적 규제, 경직된 고용구조 등 애로가 많다. 연구자나 행정 쪽이나 우수한 사람은 자꾸 떠나려 하고 바꾸고 싶은 사람은 나가지 않는다. 신경을 많이 쓰다 보니 건강이 악화될까 봐 위기감이 들 때도 있을 정도다. 미국이나 독일·일본은 10년가량 장의 임기를 보장하고 권한을 부여하는데 우리도 그런 여건이 되면 좋겠다.
-국가 연구개발(R&D) 시스템의 규정에 얽매이다 보면 애로점이 많지 않은가.
△연구자가 새로운 시도를 하겠다고 했을 때 법적 판단에 자신감이 없을 때가 있다. 실례로 김진수 전 유전체교정연구단장의 경우 정부 연구비로 신기술을 개발한 뒤 창업했는데 지식재산(IP)을 소유권자인 학교에서 헐값에 가져왔다는 이유로 기소돼 곤욕을 치르고 있다. 항소심에서 선고유예 판결을 받은 상태인데 도전적인 연구자로 성과도 많은데 아쉽다. 대학의 기술사업화 조직(TLO)이 약해 IP에 대한 평가와 활용 능력이 떨어지는데 이를 높이고 고도의 행정지원을 해야 한다. 또 연구 현장에서 데이터 보안을 중시하는 것은 좋은데 기초과학 현장에서는 좀 풀어줘야 한다. 기초수학 분야조차 내부망과 외부망을 나누고 민간 클라우드를 쓰지 못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겨울에도 실내 온도를 17도로 맞추라고 하는데 최적의 연구 성과를 내려면 이런 규정은 바꿀 필요가 있다.
-한 연구단은 8년 간 600억 원을 지원받았는데 국가과학자 출신의 단장이 일부 연구비를 부적절하게 사용했다고 해 행정·민사소송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 결과,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중국 ‘천인계획’ 의 타깃이 되기도 했는데.
△이 분은 행정법원 항소심에서 해임이 정당하지 않다고 판결을 받았다. 그동안의 마음 고생을 고려하면 기관장으로서 마음이 아프다. 자율과 규제 사이 줄타기가 참 어렵다.
-지난해 앤서니 파우치 당시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국립알레르기감염병연구소장을 만나 IBS의 바이러스연구소와 협력하기로 했는데 어떻게 됐는가.
△NIH 바이오리서치센터와 공동 연구를 하라고 했는데 아직 잘 진행되지 않고 있다. 더 노력하겠다. 다만 세계적인 세인트쥬드어린이연구병원과는 협력하고 있다.
-중이온가속기도 2007년 대선 공약으로 시작됐으나 물리학계에서조차 말이 많았는데.
△물리는 입자물리·핵물리·응집물리로 나뉘는데 중이온가속기는 핵물리 쪽으로 우주 초기에 어떤 핵이 만들어졌느냐 등 기초 연구를 한다. 미국 등 과학 선도국에서 해왔던 연구이다. 2030년 이전까지 총 1조 6500억 원가량이 투입될 예정이지만 우리도 세계 경제 10대 대국에 맞춰 글로벌 과학 연구에 기여할 때가 됐다. 그래야 노벨상도 받을 수 있다.
-지난해에는 지하실험실을 구축하는 성과도 있었는데.
△지난해 197억 원을 들여 강원도 정선에 지하 1㎞ 터널을 뚫어 암흑물질과 중성미자 등을 관측해 우주의 구조와 기원을 이해하는 지하실험실을 만들었다. 지상에 비해 잡음이 100만 분의 1도 안 돼 다양한 연구가 가능하다. 지진 등 지각에 문제가 있을 때 중력의 변화도 측정한다.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지진이 났을 때 음속인 지진파가 오려면 200분이 걸리는데 빛의 속도인 중력파는 1분 만에 왔다. 많은 출연연이 이 시설을 활용할 예정이다. 반도체 불순물 측정 등의 연구도 기대된다. 미국 연구팀도 600m 무중력 상태에서 약의 효과, 생태 변화, 우주 근원 연구를 희망한다.
-IBS의 임무 중 하나는 노벨상 수상 아닌가.
△많은 분들이 그렇게 여긴다. 보통 20~30년 연구한 뒤 성과를 내고 그로부터 20~30년 뒤에 노벨상을 받는다. 그렇다면 전혀 새로운 연구를 할 수 있는 연구자를 뽑아 지원해야 한다. 물론 지금 해외 선도 그룹과 경쟁해 우리의 능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좀 어정쩡한 상황이라는 말이다.
◆He is…
1963년에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수원 유신고,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MIT 물리학과에서 방사광가속기를 활용한 응집물질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MIT 박사후연구원을 거쳐 미국 뉴저지 엑슨연구소에서 근무했다. 1995년 광주과학기술원(GIST) 신소재공학과 교수로 부임한 뒤 물리광과학과를 신설해 적을 옮겼다. 방사광X선 과학 연구를 선도하며 외부 기관 전용 빔라인을 처음 구축했고 국가핵심연구센터(NCRC), 선도연구센터(SRC)를 이끌었다. GIST 학부를 총괄하는 학장으로서 학사 과정의 기틀을 마련했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 기초기반분과 전문위원장과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위원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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