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산업의 전환기를 앞두고 주요국들의 보호무역 기조가 강해지면서 글로벌 전기차 생산망에서 한국의 존재감이 축소될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진다. 미국이 자국에서 만든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하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발효한 데 이어 세계 최대 니켈 생산국인 인도네시아가 니켈 수출 시 관세 부과를 예고한 상태다. 한국 완성차 업체들도 국내보다는 해외를 주력 생산 기지로 삼으려고 하면서 한국의 세계 5위 자동차 생산국 지위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25일 업계에 따르면 이달 말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던 실판 아민 제너럴모터스(GM) 해외사업 부문 사장이 방한 계획을 취소했다. GM의 2인자로 꼽히는 아민 사장은 일주일간의 방한 기간에 부평공장 등 현장을 점검하고 정부 관계자들을 만날 예정이었다. 업계에서는 아민 사장의 방한이 미뤄진 배경에 미국 정부의 IRA가 자리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GM은 아민 사장의 전임자인 스티브 키퍼 사장 시절부터 한국에서 전기차를 생산할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거듭 밝혀왔다. 23일 임단협 교섭에서 로베르토 렘펠 한국GM 사장은 IRA 발효의 영향에 대해 “신생 법안인 만큼 자료를 검토하고 있다”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 다만 IRA로 GM이 한국 공장에 전기차를 배정할 가능성은 더욱 낮아졌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미국이 보조금을 앞세워 전기차 공급망 재편에 나서자 글로벌 주요 완성차 업체들은 다급하게 북미 지역으로 몰려가고 있다. 이미 폭스바겐이 올해 말로 예정됐던 미국 테네시주 공장 내 ID.4 생산을 지난달 말로 앞당겼다. 폭스바겐은 메르세데스벤츠와 더불어 전기차 배터리용 핵심 광물을 보유한 캐나다 정부와 배터리 개발에 협력하기로 했다. 테슬라는 6번째 기가팩토리를 설립할 유력한 후보지로 캐나다를 주목하고 있다.
미국의 행보에 세계 최대의 니켈 수출국인 인도네시아도 전기차 산업의 허브로 도약하겠다는 야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최근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니켈에 대한 과세 의지를 처음으로 공식화했다. 조코위 대통령은 “테슬라가 자동차도 현지에서 만들어야 한다”며 “인도네시아의 일자리를 늘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대로라면 전기차 시대가 본격화할수록 자동차 생산 기지로서 한국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올해 상반기 국내 자동차 생산 대수는 총 177만 9039대를 기록했다. 올해 1~5월 기준으로는 145만 679대를 생산해 중국·미국·일본·인도에 이어 5위다. 하지만 현재 국내 생산량을 대부분을 이끄는 현대자동차그룹의 전기차 생산량에 따라 이 순위는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 현대차그룹은 국내 전기차 연간 생산을 2030년 144만 대까지 끌어올려 글로벌 목표치의 45%를 한국 공장에서 만든다는 계획이지만 향후 주요국의 전기차 정책에 따라 바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