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자국 중심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서두르면서 국내 기업들의 ‘북미 진출 러시’도 가속화되고 있다. 최근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서명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까지 더해 현지 생산 필요성이 극대화되면서 주요 기업들의 북미 투자 움직임이 더 빨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SK·현대·LG 등 국내 주요 그룹들은 계열사별로 북미 지역 중심의 공급망 다변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가장 최근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한 그룹은 SK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달 바이든 대통령과의 화상 면담에서 미국에 220억 달러(약 28조 8000억 원)의 투자 보따리를 풀겠다고 약속했다. 특히 미래 산업으로 각광받는 반도체·배터리·바이오에 투자가 집중될 계획이다.
미중 무역 갈등을 계기로 주요 산업에서 경쟁 우위를 차지하려는 양국의 움직임이 강화되며 반도체·전기차 배터리 등 사업을 크게 확장 중인 한국의 북미 진출은 불가피해졌다. 각 주정부에서 제시하는 파격적인 인센티브안을 고려하면 한국 기업으로서도 가격 경쟁력 측면에서 미국에 대한 투자가 나쁘지 않은 선택지다. 삼성전자가 향후 20년에 걸쳐 2000억 달러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자해 텍사스주에 반도체 공장 11곳을 세우는 중장기 계획을 추진하는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다. 여기에 IRA가 미국에서 생산된 제품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에서 공급된 핵심 광물에 세액공제 혜택을 주기로 하며 북미 투자 추세가 더 강화됐다는 분석이다.
미국 전기차 시장을 주목하고 있는 현대자동차그룹은 이미 5월 바이든 미 대통령의 방한 당시 미국에 2025년까지 로보틱스 등 미래 먹거리 분야에 5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방한 직전 발표한 조지아주 전기차 전용공장 설립 등을 위한 투자비용을 포함하면 약 3년간 105억 달러의 대규모 자금을 미국에 투입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이번 IRA 통과로 현대차그룹이 미국에 투자해야 하는 비용은 ‘105억 달러 이상’이 됐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당장 이번 법안의 세액공제 대상에서 한국 차종은 제외됐지만 미국 내 생산을 강조하는 추세에 비춰보면 공장 증설이나 고용 확대 등이 불가피하다. 업계 관계자는 “보조금 없이는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 힘든 만큼 결국 현지 투자와 생산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전기차에 들어가는 배터리 역시 IRA에 따른 세액공제 대상이 되며 배터리 3사의 미국 투자도 더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자동차 회사 제너럴모터스(GM)와 네 번째 배터리 공장 설립지로 인디애나주를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양사는 이미 오하이오주와 테네시주·미시간주에 3개의 합작공장을 짓고 있다. SK온 역시 미 완성차 업체 포드와 총 3개의 합작 공장을 건설 및 추진하고 있으며 삼성SDI는 스텔란티스와의 합작공장을 계기로 북미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밖에 LG화학은 배터리 핵심 소재인 양극재 공장을 세우기 위해 캐나다를 포함한 북미 지역의 여러 부지를 검토하고 있다.
IRA가 친환경 발전 사업에 대한 지원을 대폭 확대하는 만큼 한화솔루션도 미국에 태양광 패널 공장을 추가로 건설하는 방안 검토에 나섰다. 한화솔루션의 태양광 사업 자회사인 한화큐셀은 대규모 신규 공장을 지을 후보 부지로 조지아·사우스캐롤라이나·텍사스주를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우제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한화솔루션의 미국 시장 개척 계획에 따르면 향후 10년간 적용받을 수 있는 직접적인 세금 감면 혜택은 최소 2조 3000억 원에 달하고 간접적인 효과도 클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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