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정부와 의사들이 의료 혁신과 바이오·생명과학 대국(大國)을 만드는 데 합심해도 모자랄 판에 서로 비난하는 처지가 됐으니 안타깝죠. 새 정부는 미국 국립보건원(NIH)처럼 의학을 독립적으로 관장할 사령탑을 갖췄으면 합니다.”
왕규창 신임 대한민국의학한림원 원장은 30일 서울경제와 취임 이후 첫 언론 인터뷰를 갖고 “2001년 보건의료기본법 제정 후 정부가 단 한 차례도 보건의료발전 계획을 세우지 않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일정 비율 이상의 의사가 기초의학 연구개발(R&D)에 참여하도록 기초의학을 우대하고 이를 ‘산학연병(産學硏病)’ 기술 사업화로 확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왕 원장은 “공공의료, 필수 의료, 응급의료센터, 적정 의사 수 논란, 의사과학자 육성, 바이오·헬스케어 산업 발전, 저출산·고령사회 대처 등 현안이 산적해 있다”며 “정부와 의사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소통해 대한민국 발전을 위한 파트너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선 국내 의료 체계를 평가하고 개선점을 꼽는다면.
△해외에 비해 저렴하고 빠르게 접근할 수 있다. 다만 대형 병원과 중소형 병원 간 양극화 현상이 심하다. 의료 분쟁이 나면 ‘이 검사는 왜 안 했느냐’고 한다. 하지 않아도 그만인 검사까지 마구 하는 경우가 많다. 현 정부에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문재인 케어)을 추진했는데 지속 가능할지 의문이다. 검사나 시술이 크게 늘면서 나라 재정이 골병들고 있다. 정작 의료 수가는 높지 않아 환자가 밀려드는 대형 병원조차 교육과 연구에 투자할 여건이 되지 못한다. 특히 비인기과인 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 돈도 벌기 힘든데 일은 더 힘들고 잘못되면 뒤집어쓸 염려가 있어서 기피한다. 수술용 폐쇄회로(CC)TV 정책도 중요한 이슈였는데 일부 일탈 의사들을 미국처럼 중징계하면 된다. 외과 지원 전공의가 줄어들게 하고 자꾸 방어 진료를 하게 만들 필요가 있는가.
-정부와 의료계 간 불신이 큰데.
△보건의료기본법에는 5년마다 보건의료발전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돼 있다. 하지만 2001년 법 제정 이후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수많은 현안이 산적해 있는데 정부와 의료계가 윈윈 방안을 찾아야 한다.
-재작년 전공의·전임의 파업 사태로 갈등이 극에 달했었는데.
△의사 수가 부족하다며 외래 진료 횟수나 검사·수술 대기 시간 등 데이터에 대한 심층 분석도 없이 코로나19 사태 와중에 정부가 의사 수 증원, 공공 의대 신설, 원격의료 등을 밀어붙였다. 의사들 관점에서는 의사 수 정원 확대는 정치적 선물용으로 보인다. 다만 의사 수 증원이 필요하면 2000년 의약 분업 사태 이후 많은 의과대학이 정부 권고로 10%씩 줄인 학생 정원부터 다시 늘리는 게 맞다. 공공의료와 지방 의사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의대에서 공공의료와 기술 사업화 쪽으로 전문성을 확보할 인재가 나오게 해야 한다. 하지만 의대의 생태계 마련 없이는 힘들다. 비대면 진료(원격의료)는 오지·낙도에서도 의료 혜택을 보게 하고 만성 복합 질환자를 관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오진과 동네 병원 위축, 정보기술(IT) 플랫폼 기업으로 의료 체계가 종속될 우려도 있다. 의사협회와 의학한림원도 준비해야 하지만 정부가 밀어붙이면 불안해 마음의 문을 닫게 된다. 이밖에 첩약 급여화 시범 사업은 안전성·유효성에 대한 과학적 검증이 돼야 하는 것 아닌가.
-코로나19 팬데믹 대처와 기초의학 강화, 기술 사업화를 위해서도 정부와 의학계가 합심해야 할텐데.
△당연하다. 팬데믹 상황에서 새로운 질환의 진단·예방·치료와 원활한 임상 자료 확보를 통한 연구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 불확실한 재난성 질환에 대비하려면 상호 신뢰가 중요하다. 현재 기초의학 쪽에 대한 대우가 좋지 않아 이 분야가 취약하다. 돈을 더 벌 수 있고 의학 연구도 같이할 수 있는 임상의를 하려고 한다. 기초 전공의와 기초 전임의 정원을 만들고 임상의사들에 대해 자존감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대우해야 한다. 이를 통해 산학연병 기술 사업화를 확산해야 한다. 새 정부에서는 미국 NIH나 일본 의료연구개발기구(AMED)처럼 의학을 독립적으로 관장할 사령탑을 갖췄으면 한다. 현재는 한국연구재단이 의학 연구에 지원할 때도 견제를 받는 실정이다. 컨트롤타워가 없으니까 누구도 의과학자 양성, 기초의학 정상화, 기술 사업화 등 장기 계획을 추진하기 힘들다. 의학 연구에서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격자)’만 하면 우리나라 의료를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겠는가.
-기술 사업화 쪽에도 신경을 더 써야 하는데.
△대학과 의료기관에서 창업 지원 프로그램을 적극 활성화하고 연구자가 소속 기관에서 개발한 직무 발명을 최적의 조건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육이나 진료 의무 완화, 산업화 과실에 대한 적절한 대우가 필요하다. 바이오·의생명 기술 분야에서 기초연구와 응용 연구의 균형, 정보기술(IT)·기계·전기전자·화학 등과의 융합 연구를 촉진해야 한다. 의대에서도 의사로서 기본을 갖추게 하는 것만으로도 사실 벅차기 때문에 기업가 정신 육성 프로그램이 부족한데 이 부분도 보강해야 한다. 요즘은 서울대·연세대·고려대·성균관대 등의 의대들도 이쪽에 신경을 쓴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포스텍 등 과학기술 특성화대에서 미국 일리노이공대나 이스라엘 테크니온공대를 참고해 의대 신설을 추진하는데.
△그 취지는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사실 서울대 의대도 의학전문대학원 체제 이전에 정원의 3분의 1을 공대·자연대·인문대 졸업생(4년)으로 뽑은 적이 있다. 2년의 의대 예과 과정을 건너뛰고 4년의 의대 본과 과정을 밟게 한 것이다. 연세대 의대 등 다른 일부 대학도 비슷한 실험을 했다. 그러나 의전원 체제가 실패하며 의대로 다시 복귀한 뒤에는 오히려 정부가 이렇게 하지 못하도록 했다.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의전원은 미국의 ‘4(비의대)+4(의대)’ 제도를 참고해 다양한 의사와 의과학자 양성, 기초의학 발전을 추구했으나 큰 갈등을 낳았다. ‘채찍과 당근’ 전략을 통해 27개 대학이 의전원으로 전환(부분 포함)했으나 여전한 임상의사로의 편중, 학생의 고령화, 경제적 약자의 진입 애로, 군의관 수 부족 등의 문제들이 드러났다. 결국 현재 의전원 체제인 곳은 한 곳밖에 없다. 의대가 희망할 경우 자발적으로 ‘4+4’ 제도를 부분 또는 전부 시행할 수 있게 다시 허용하면 좋겠다.
-기존 의대의 융합 활성화가 더 효과적이라는 얘기인데.
△그렇다. 의사가 환자를 보며 연구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의사들이 과학자의 길을 갈 때 적절한 대우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게 우선이다. 아무리 사명감에 호소하고 과기 특성화대에 의대를 만들어도 생태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사상누각이다. 미국에서는 많은 의대 졸업생이 의사과학자의 길을 경쟁적으로 선택하지 않나. 우리는 의대 졸업생들이 공공의료나 의학 연구에 매진할 수 있게 전공의 수련 과정의 대학원 체계를 갖춰야 한다. 이 과정은 전액 국비 지원이 필요하다. 물론 비의대생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 군 전문 요원 제도도 잘 활용해야 할 것이다.
-KAIST 의과학대학원이나 몇몇 연구 중심 의대 대학원 과정을 마친 뒤 대부분이 임상의로 돌아가던데.
△그래서 더 생태계 조성이 중요하다. 공공의료를 위한 대학이나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한 대학을 설립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현재 의료 연구개발(R&D) 현장에서도 뇌과학연구원·KIST 뇌과학연구소·기초과학연구원처럼 뇌를 연구하는 연구소에서도 의사가 한 명도 없는 게 현실이다.
-기존 의대 체제로는 의과학자 양성이나 기술 사업화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많은데.
△우리가 자동차를 생산하지 못하던 시절에는 ‘왜 우리는 자동차를 못 만드나. 이는 공대 잘못이야’라고 말한다면 맞는 얘기인가. 투자 기업이 있어야 하고 소비자가 많아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서정선(마크로젠), 양윤선(메디포스트) 등 교수 출신 의사 창업가도 있다. 하지만 의사 자체가 크게 회사를 키우는 것은 외국에서도 드물다. 바이오는 초기 투자를 많이 해야 하고 과실이 나올 때까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위험도 크다. 다행히 우리도 의료 산업화에 대해 사회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여건도 나아지고 있다.
-바이오 생명과학 대국을 만들려면 롤모델이 많이 나와야 할 텐데.
△고(故) 이민화 전 벤처기업협회장이 이미 1985년 초음파진단장비 벤처인 메디슨을 만들었고 세계적 뇌과학자인 조장희 박사가 이미 1970~1980년대에 양전자방출단층촬영(PET)과 2T 초전도 MRI를 개발했다. 하지만 메디슨은 삼성에 매각됐다. 조 박사는 기업 지원으로 첨단 장비를 개발해 서울대병원에서도 썼으나 기업이 관련 사업을 포기해 같이 접을 수밖에 없었다. 저도 뇌척수에 내려가는 튜브 국산화를 시도했는데 기업이 관심을 보이지 않아 지속할 수 없었다. 대기업의 대표적인 최고경영자(CEO)가 과거에 “규제가 많고 승산도 적은데 왜 의료 기기 사업을 하느냐. 접으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게 현실이다. 기업가 정신이 부족하고 규제도 많다.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He is…
1954년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병원에서 신경외과 전공의 과정을 마쳤다. 군 복무를 거쳐 서울대 의대 소아신경외과학 전임강사를 했다. 신경계 기생충학으로 의학박사를 받았다. 미국 시카고 소아기념병원에서 신경외과 영역 선천성 기형 질환에 대해 연구한 뒤 국내에서는 관심이 없던 척수이형성증의 통합 진료, 연구, 환자와 가족에 대한 교육에 주력했다. 서울대병원 연구기획부장·교육연구부장, 서울대 의대 학장, 한국뇌신경과학회장, 대한소아신경외과학회장, 국제소아신경외과회장, 대한의학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현재 국립암센터에서 국가 암 진료 가이드라인 사업단장을 맡으면서 소아신경외과 진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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